역사의 발자취

역사의 발자취

과거를 기억한다 함은, 성령과 역사의 그 순간에 뿌리를 두고, 우리의 경험이 새로운 세기의 도전들에 힘차게 직면하게 하는 새로움으로 우리 자신들을 개방하기 위하여 우리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기억은 과거에 중요했던 것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을 현재화시킵니다. 기억은 여성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기억은 지나간 사건들을 현재로 데려와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마음 안에 지나간 사건들을 간직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리의 현재 경험 안으로 포함시켜 우리가 점점 지혜로워지도록 도와줍니다: 마리아는 마음속에 그 모든 것들을 간직하였다. (루카 2,48-51) 그것은 감사를 드리기 위해 과거를 현재로 기쁘게 맞아들이는 마음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사건들을 생생하고 살아있게 하여, 그 사건들이 미래를 향한 기준점과 자극이 되도록 합니다.

패트리샤 가르시아 드 퀘베도 수녀님의 2000년 5월 25일 편지에서

성심수녀회는 1800년 창립되어 2000년에 200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성심수녀회는 1956년 한국에 진출하였고 내년 2016년 6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 저희의 은사와 사명을 살도록 초대해 주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또한 저희와 함께 발자취를 더욱 생동감 있게 나누어주신 많은 은인분들께 감사드린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다가오는 미래에 더 깊이 사명에 투신할 수 있는 통찰력과 안목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세계 성심회 역사

성심수녀회 역대 총원장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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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 소피이 바라

  1. 부르고뉴 태생 : 소피이 바라는 1779년 12월 12일 밤, 삼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인 쥬앙니는 현재 프랑스 욘 지방에 있으며, 포도 재배와 임업이 주된 산업이었다. 소피이의 부모님은 술통은 만드는 집안 출신이었다. 시골의 소시민 계급에 속했지만, 당시로는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던 중이었으므로,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고, 학업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소피이는 나이에 비해 작고 말라서, 교리 시간에는 의자 위에 올라서야 신부님 눈에 띌 정도였다. 몸집은 작았어도 어린 소피이는 활달했다. 성격은 세심한 편이나, 그녀가 보이는 즉각적인 반응들은 충동적이었다. 소피이 바라는 늘 똑부러지게 대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놀기를 좋아했고, 언덕에 나가 걷는 것을 즐겼다. 주위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고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낼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어머니 덕분에 어린 소피이는 다른 사춘기 소녀들이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받았다. 소피이는 10살 되던 해부터, 11살 위의 루이 오빠에게 맡겨져, 엄격하면서도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매우 총명한 소피이는 루이가 가르치고 있는 쥬앙니 중학교 교과 과정을 집에서 그대로 이수했다. 그리하여 소피이는 고대사와 현대사, 성서, 라틴어, 수학, 그리이스어, 물리학 히브리어 초급, 돈키호테를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등을 배웠다. 이는 소피이에게 독서를 하며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한 흥미를 북돋아 주었고, 차차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자신의 몫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소피이는 또한 다섯 살 때,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조숙함을 보이기도 했다. 1789년에 첫영성체를 했고, 열렬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여 매일 아침 성 티보 성당 미사에 참례하곤 하였다. 14살에는, 동정 서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루이 바라가 파리에 머물면서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그림을 보내 주기도 하는 등의 중간 역할 덕분에, 바라 가족은 좀 더 일찍 얀센주의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바라 가족은 매일 기도하려고, 하느님 신비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이 그림들 앞에 모이곤 했다.

혁명은 바라 가족의 삶을 혼란스럽게 했다. 교황청이 혁명 입법을 반대하여, 그 법에 동의하는 성직자들을 파문하겠다고 했을 때, 루이 바라는 이미 했던 국가와 국왕께 대한 동의 선서를 취소했다. 이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루이 바라는 남 몰래 다비예 거리에 있는 다락방 한 구석에 한 동안 몸을 숨겨야 했다. 바라 가족의 재산은 차압당했고, 루이는 가족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파리로 피했으나, 결국 1793년 5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단두대 처형을 면했다. 그때 소피이는 어머니가 기운을 차리도록 도우며, 강한 의지력을 보였으나, 이 불안한 나날을 통해 ‘혁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대결하는 증오의 때’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840년에 프랑스 혁명 때 부르던 노래 ‘라 마르세이예즈’ 에 그녀는 늘 몸서리쳤으며, 1840년과 1848년에는 공포정치에 반대하는 대중 시위에 참가했다.

1795년 1월에 석방된 루이 바라는 1795년 9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어린 누이가 파리에서 그의 지도 아래 신앙생활과 학업을 계속 연마하도록 쥬앙니를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소피이는 약하게만 느껴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또한 구체적인 길을 모르면서도 마음속에 막연히 지녀왔던 수도생활에 대한 소망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격려했다. 소피이는 1795년 9월 거룻배를 타고 쥬앙니를 떠났다.

오빠는 그녀를 투렌느가 2번지(현재 생통쥬가 4번지)에서 살게 했고, 그곳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곤 했다. 소피이는 그 지역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몇몇의 소녀들과 더불어 신앙교육과 일반 교육을 계속 받았다. 그녀는 가르멜 수도생활을 꿈꾸었으나, 성체 흠숭과 여성교육, 즉 내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을 연결시켜, 새로운 형태로 성심 공경을 하는 영성을 지닌 수도생활에 관한 영감을 받았다.

1800년 가을에, 봐랭 신부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다. 그는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예수 마음의 사랑을 전하는 수단으로 여성교육에 헌신하고자 세워진 여자 수도회인 ‘예수의 사랑받는 자매회’를 프랑스에 알리고자 했다. 1800년 11월 21일, 소피이 바라는 투렌느가의 기도방에서 첫서원을 했다. 1년 뒤, 1801년 11월 13일 피카르디 출신의 두 여성, 앙리에트 그로지예와 쥬느비예브 데에와 함께 첫 공동체를 이룬 것은 아미엥에서 였고, 이로써 독창적인 사도적 수도생활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2. 성심회 창설을 바라보며 (1801-1815)

소피이 바라의 삶은 1801년부터 조금씩 수도 생활과 하나로 엮어져 갔다. 1802년 12월 21일, 그녀는 아미엥의 원장이 되었다. 그녀의 인간적, 영적 자질은 이미 충분히 인정되어, 사람들은 그녀가 수도회를 이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바라 수녀는 통치하는 일에서나, 개인적인 생활면에서 독립성과 상호의존성의 조화를 잘 이루면서, 신중하고 확고한 자질을 발휘하였다.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기쁨이 어린 공동체의 삶을 창출할 줄 알았기에, 훗날 ‘예수 마음 안에 한 마음 한 뜻’을 성심회의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 기숙학교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통학학교라는 두 가지 형태의 학교에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실현된 성심의 독특한 사도직은 바로 아미엥에서 시작되었다. 바라 수녀가 처음부터 수도원적 삶의 형태를 이룰 생각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나, 수도회의 삶은 매우 관상적이었다.

초기에 이 새 공동체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예수의 사랑받는 자매회와는 정치적 이유로 갈라서야 했다. 제 1제정 치하에서 해체당할 염려 때문에 ‘성심’ 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고,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 라는 이름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804년부터, 성심회가 프랑스 안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방문회의 옛 수련자였던 필리핀 뒤셴이 생활하던 그르노블의 쌩뜨 마리당 오 수녀원이 처음으로 성심회와 통합했다. 1806년 바라 수녀는 26세의 나일 원장이 되었는데, 이는 종신직이었다. 그리하여 바라 수녀는 거의 반세기 동안 프랑스와 유럽을 두루 돌아다니며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고, 통합을 희망하는 수도원들을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서로의 일치를 강화하고 돈독히 하였다.

1807년, 갓 태어난 성심회는 앞으로 6년간 지속될 위기의 시작으로 흔들렸다. 이 갈등이 사도적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나, 성심회의 은사와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바라 수녀의 권위를 거부하는 수녀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은, 성심을 영성의 기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심에 봉헌하는 것을 반대하고,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이냐시오식 전통에 도전했다. 어떤 수녀들은 성심회의 근본정신이 되는 성심회의 은사와 그 정신을 실현하는 방법인 청소년 교육을 혼동하였다. 18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심회의 창립 정신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왕권의 부흥은 성심회의 은사와 존재의 뿌리를 나타내는 ‘성심’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허락했다. 1815년 12월 16일의 회헌의 채택은 복잡하게 얽힌 법적 지위를 확실히 하고, 성심회의 삶을 구성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826년 12월 회헌에 대한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3. 발전

이때부터 성심회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먼저 프랑스에서는 주교들과 몇몇 부자들의 요구에 따라, 성심회를 승인한 국가의 배려에 힘입어 1827년 수녀원과 학교들이 세워졌다. 1818년, 성심회는 프랑스 바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필리핀 뒤셴과 함께 몇몇의 수녀들이 배를 타고 루이지애나에 갔다. 같은 해에 사부아(Savoie)에서 성심회의 설립을 요청했고, 이어서, 이탈리아, 벨기에, 아일랜드, 영국, 알제리, 오스트리아의 폴란드 구역, 티롤(Tyrol), 스페인, 웨스트팔리(Westphalie),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세웠다. 마들렌 소피이 바라의 총원장 기간 내내, 미국과 캐나다에 북아메리카 분원들이 많이 생겨낫고, 카리브 해를 그 첫 관문으로 하여 남아메리카 지역까지도 차례로 퍼져 나갔다. 창립자의 소망에 따라 북돋워진 이런 확장은 예수 마음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맞설 각오가 되어 있는 수녀들 덕분에 가능했다.

이런 확장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녀들은 유럽 여러 나라의 자유주의적 경향과 혁명적인 움직임들의 표적이 되어, 북이탈리아와 스위스로부터 여러 공동체가 떠나와야만 했다. 반면, 이런 강압적이며 고통스러운 철수는 프랑스, 아메리카, 유럽 다른 나라들, 그리고 새로운 선교지에 새로운 공동체들을 설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심회의 지역적인 확장이 기숙학교에 의해 이루어진 성공을 의미한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 마음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가겠다고 한 마들렌 소피이 바라, 창립자의 은사가 구현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또한 성심회 회원들에게 다른 문화들을 접하도록 하며, 개방성과 관대함으로 초대되는 기회였다. 회원의 증가 역시 놀랄 만했다. 기숙학교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회원이 필요했는데, 또한 이 기숙학교들의 사도적 활동 자체가 많은 성소를 낳았다. 그런데도 끊임없는 공동체 설립의 요청에 모두 응답하기에는 부족했다.

예수 마음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고유한 방법들이 점차 다양해졌다. 기숙학교들이 반 기숙생들을 받아들였다. 특수학교들이 장애자, 고아, 소년들을 위해 문을 열었다. 수녀들은 재봉교실을 열었고, 어른들도 받아들였으며, 초등학교 교사들을 준비시켰다. 1818년부터, 기숙사 내에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는 신심 단체를 만들어, 열렬하며 성실한 영성 생활에 친숙해지도록 학생들을 도왔다. 1832년부터는 졸업생들이 정기적인 피정을 통해 모였다.

4. 일치의 문제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계속 확장되는 수도회가 진정 한 몸을 이루도록 이제 어느 때보다도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특별히 어마어마한 편지(현재 보존되고 있는 편지는 14,000통) 왕래와 정기적인 회람을 통해서 수도회를 하나로 엮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같은 곳에서 수련을 받도록 수련원을 한 곳에 마련하고, 종신서원 전에는 몇 개월간 총원장 옆에서 보내도록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급속도의 확장에도 성심회 안에 수도회 붕괴의 조짐은 없었다. 유럽과 미국에 점차 뿌리를 내리면서, 회헌 및 모원의 장소에 관한 재검토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람들은 통치 양식의 변화가 필요하며 모원을 로마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성심회의 회헌이 예수회의 회헌과 같은 맥락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생긴 불화가 1839년부터 1843년까지의 대위기를 일으켰다. 이 위기 동안,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자신의 지위를 존중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법령들을 수도회에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의 참사회도 분열되었다. 위기는 성심회의 구조 변화에 호의적이지 못한 정부와 프랑스의 주교들과의 갈등 대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프랑스와 다른 나라 분원들 사이의 분열을 가까스로 모면했을 정도였다. 바티칸으로부터 해결책이 나왔다. 1843년 3워 4일, 교황청 성성은 1839년 법령을 취소했다. 총원장의 만류에도 4명의 총참사 중 2명이 해임되었다. 성심회를 떠난 수녀는 아무도 없었으나, 이 위기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그 흔적을 남겼다.

그 뒤 몇 달이 지나고, 다시 몇 년이 지나면서,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권위를 되찾았다. 그녀는 수도생활에 새로운 활기를 찾도록 애썼다. 젊은 수녀들이 순명의 정신을 존중하도록 양성할 것을 당부하면서, 모든 수녀들에게 처음의 근본정신을 다시 되살려 주고자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 몸’이 되는 일치의 정신은 기도와 청빈이라는 소중한 미덕을 실제로 살지 않으면, 얻지 못할 귀한 열매였다. 이러한 재창건의 노력이 효과를 거두었고, 수도회의 확장은 계속되었다. 마들렌 소피이 바라가 1865년 5월 25일 예수승천대축일에 세상을 떠났을 때 성심회의 회원을 3,539명이었으며, 유럽에 64개, 미국과 캐나다에 20개, 쿠바에 2개, 남미에 3개의 공동체가 있어, 전부 89개의 공동체가 있었다. 바라 수녀는 말년에,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앞날을 위해 성심회를 더욱 굳건히 하면서, 성심회가 시대의 필요에 성실히 응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기울여 끝까지 헌신했다.

국제 수녀회로 발전하며..

1. 약동기 : 마들렌 소피이 바라의 선종 이후 수십 년 동안, 성심회는 계속 놀랄 정도로 확장되어 갔다. 19세기 말에는 회원 수가 무려 6,649명에 이르렀고, 1967년에는 7,000명이 넘었다. 유럽에서의 확장은 보헤미아, 헝가리, 스코틀랜드에까지 이르렀다. 성심회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도 퍼져 나갔다. 다양한 국적의 수녀들이 이루어낸 이런 확장은 여러 관구장 수녀들의 노고에 따른 것이었다. 마리빌-시카고의 관구장 수녀가 뉴질랜드에, 루이지애나의 관구장 수녀가 하바나와 푸에르토리코에 공동체를 열었다. 칠레는 페루,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 새 공동체를 세웠다. 영국은 인도, 호주, 몰타에 수도원을 세웠고, 벨기에는 콩고에 수녀들을 파견했다. 때가 되자, 오스트레일리아는 일본에 성심회를 창설했고, 1956년에는 한국의 성심회가 창설되었다.

2. 창의적인 사도직 활동 : 생명은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성장한다. 성심교육의 대상들이 상황에 따라서 새로워졌다. 미국의 흑인 학생들 가운데는 기본 교과 과정을 마친 소녀들과 ‘어른 기숙 학생들’도 있었다. 또한 영국에는 자격증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나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준비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상급과정’의 학생들이 있었고, 이집트의 엘리오폴리에서는 비그리스도인들과 이슬람교인들이 있었고, 일본 산코초에는 불교 신자들과 신토이즘 신자들, 봄베이에는 카스트 제도의 여러 신분계급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미국과 푸에르토리코에, 그 다음에는 중국, 인도, 페루에 대학을 세웠다. 학교 기관들은 점차로 남학생들에게도 문을 열었으며, 평신도 교육자를 받아들였고, 오지에 학교들이 세워졌다.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제부터 ‘학교’가 ‘기숙사’ 보다 자주 우선시 된다. 수녀들은 소외된 사람들 곁에 함께하는 삶의 형태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졸업생들을 자선 활동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쟈네트 스튜어트 수녀는 확실히 그 당시 탁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1857년에 태어났고, 1911년에 총원장직에 선출되었으니, 그녀는 바라 수녀를 만나본 적도 없고 성심회 기숙학교에서 성심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적도 없이 뽑힌 첫 번째 총원장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성심회 통치가 창립 정신이 충실히 드러나려면, 보수주의를 넘어서 사회적, 문화적 진보에 적응하도록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 첫 인물이었다. 뛰어난 교육학 책을 썼던 스튜어트 수녀의 총원장 임기는 너무 짧아서 개혁의 진행을 느낄 수도 없었고 더구나 개혁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었다.

3. 첫 정신에 충실하며 : 마들렌 소피이 바라의 매력적인 성격은 계속해서 회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갖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도 안 되는 1870년 1월에, 교황 비오 9세는 그녀의 행적에 관한 증거 자료들을 수집하라고 권했다. 1879년부터, 교회가 그녀의 성성에 대한 확인 과정과 시복을 위한 절차를 밟으며 성심회 수녀들은 그녀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그녀의 글을 주의 깊게 공부하게 되었다. 1893년에는 바라 수녀의 시신이 상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1908년에 시복되었고, 1925년에 성인품에 올라 그 후에도 끊이지 않는 존경을 받았다.

4. 충격적인 추방 : 20세기 초, 프랑스에서의 수도원에 대한 적대적인 입법 조치는 충격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결국 사명을 사는 데는 유익하기도 했다. 성심회는 프랑스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1909년까지 이어진 추방 사건은 성심회가 자신을 낳고 국제성을 키워준 나라를 떠나오게 했다. 처음에 2,500명의 수녀들이 추방되었으나, 많은 이들은 관대하게도 가까이 혹은 멀리에 새로운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다. 마들렌 소피이 바라의 시신은 벨기에로 옮겨져, 지금까지도 그곳에 모셔져 있다. 총원장과 참사회는 브뤼셀에 자리 잡았다. 1차 세계대전이 일으킨 혼돈과 벨기에 점령 사건은 ‘모원’을 로마로 옮기도록 했다.

5. 새 활력을 띈 성심 신심

20세기에, 신학자들은 성서와 전례에 따른 성심 신심의 근거를 강조하면서, 1956년도 회칙 ‘너희는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 에 의해 재구성된 성심 신심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앞서 몇 해 동안 젊은 스페인 수녀, 조세파 메넨데스가 받은 사적 계시의 내용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리 테레즈 드 레스퀴르 총원장이 이 메시지를 ‘보상’, ‘신앙’, ‘사랑’ 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했다. 조세하의 ‘사랑의 부르심(Appel a l`Amour)’을 알리고자 생긴 단체, ‘영혼의 고리’는 1957년에 성심회 밖의 세상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새로운 출발

– 1950년대 말부터 성심회는 역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 선교의 열정 : 이 당시에는, 선교에 대한 유례없는 열정이 주목할 만했다. 동유럽, 아시아와 쿠바에 세워진 공산주의나 마르크시즘 계열의 체제 대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고도 성심회는 한국과 대만에 진출했다. 이러한 선교 열정은 우간다, 챠드, 케냐에 이르렀다. 선교를 위한 노력은 공동체 설립에 중요한 몫을 했으며, 뿐만 아니라 젊은 평신도들을 교육하여 제 3세계의 여러 나라로 파견하는 일로 연결되기도 했다. 선교에 대한 열렬한 협력이 졸업생들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졸업생들은 1960년도 로마 세계 총회에서 처음 서로 만났고, 1965년 브뤼셀에서 세계 성심 동창회를 발족시켰다.

1960년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수녀들이 ‘천민’들이 사는 시골 본당인 ‘하리가운’에서 살 기 시작했고, 1965년에는 안데스 산맥의 인디언 마을, ‘하엔’에 들어가 살았다. 1963년에 는 수녀들이 시리아 수도원을 떠나, 바르셀로나의 ‘베소스’라는 빈민 지역에 정착했다.

2. 구조의 변화 : 성심회의 총원장 사빈느 드 발롱 수녀는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관자로 참석했고, 공의회가 다 끝나기도 전인 1964년도 성심회 총회는 젊은 수녀들의 공부를 위한 새로운 체제를 마련하고, 수녀원 내의 수녀들의 신분 구별을 없앴으며, 봉쇄를 폐지했다.

이제부터 성심회의 특징적인 모습이 발달했다. 큰 기숙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교육 과정이 단일화 되고 학교들이 없어지자, 교육기관에는 새로운 생명력이 생겼다. 라틴 아메리카와 이집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수녀들이 대도시의 가난한 지역의 복음화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야학과 후원회를 조직하고, 시골의 소외된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시대의 징표’에 응답해야 하는가를 모색한 것은, 1967년 총회에서였다. 드 발롱 수녀가 총원장직을 사임한 후, 총원장의 종신직 임기 폐지와 새로운 행정 조직은 실제적인 통치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점차로 공동책임을 강조하고 지역 특성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미묘한 시기에 조세파 불토 수녀는 성심회가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도록 재촉하면서도 단순한 마음으로 성심회의 일치를 유지할 줄 알았다.

3. 사도적 삶의 쇄신

교육에 대한 전망이 점차 넓어졌고, 세상 속으로의 개입도 다양해졌다. 수녀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인간의 통합적인 성장을 위해 일했다. 1970년 총회 덕분에, 성심회는 한 중심, 즉 그리스도의 마음에 중심을 두기 위한 5가지 선택을 심화했다. 그것은 ‘공동과 나눔’의 정신, 일치를 사는 ‘국제 공동체’, 교회를 위한 봉사로 재확인 된 ‘교육적 사명’, ‘제 3세계와의 연대’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이다. 총원장 마리아 들 라 콘셉시온 카마초 수녀의 재임 기간(1970~1982)에, 성심회는 급변하는 시대에 역행하며 이 5가지의 선택을 살았다. ‘관상적인 안목’ 으로 키워진 식별과 기도에 바탕을 둔 강한 영성적 도약으로 수녀들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지행하게 되었다. 봉쇄의 폐지와 가장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위한 고민은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고, 공동체가 세상 속에 끼어 들어가 살 것을 요청했다. 곳곳에서 소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총참사회는 모든 관구들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분출하는 이러한 노력과 움직임들을 지지해 주었다. 1979년 멕시코 관구장 회의에서는 현시대의 발전은 ‘신앙에 바탕을 둔 정의 교육’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의식했다.

헬렌 맥러플린 총원장(1982~1994) 수녀는 국제교육위원회로 하여금 이를 계속 성찰하도록 했고, 상호 소통과 대화를 위한 통치를 했다. 매우 자율적인 작은 공동체 설립들은 성심회 수녀들을 인도네시아, 니카라구아, 파라과이, 모스코바, 중국 등 새로운 곳에 살게 했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공산주의 계열 국가들의 체제 변화로, 성심회는 다시 헝가리와 쿠바로 돌아갔다. 1982년도 총회는 새 회헌을 만들었고, 교회와 오랜 시간 유익한 대화를 나눈 후, 비로소 1988년 새 회헌이 통과되었다.

성심회의 국제성을 더욱 잘 살고자 하는 소망이 캐나다에서의 1994년도 총회에 반영되었다. 이 총회 중에 유럽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최초의 총원장으로 파트리시아 가르시아 데 퀘베도 수녀가 선출되었다.

– 프랑스, 모니크 뤼라르 수녀

한국 성심회 역사

아시아  성심수녀회 역사 개괄

아시아로 부르심

아시아의 부르심은 마들렌 소피 바라 수녀님이 중국에 성심수녀회를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요청은 그 후 여러 번 거듭되었지만 수녀님께서 생전에 그 일을 이루지 못했고, 사실 1926년에야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1908년은 소피 수녀님의 시복식이 있었던 해인데, 나중에 2000여 명의 수녀들이 프랑스에서 추방되는 일을 겪게 되는 마벨 딕비 총원장 수녀님은 자신도 콩플랑을 막 떠나려는 때, 예수회와 성심수녀회에 일본의 고등 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을 설립해 달라는 교황 비오 10세의 요청에 응답을 하였습니다. 만일 성심수녀회가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면 동양으로 가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딕비 총원장께서는 생전에 프랑스 땅에서 죽은 씨앗의 첫 열매들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즉  프랑스인 관구장인 아멜리 살몬 수녀와 함께 호주로부터 네 명의 수녀를 (세 명은 아일랜드 수녀, 한 명은 뉴질랜드 수녀) 일본으로 파견하였는데, 아멜리 수녀는 그 후 그들이 잘 정착하는 것을 볼 정도로 동경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첫 번의 창립 멤버들은 다른 수녀들에 의해 보강이 되었는데 그리하여 1912년경에는 아일랜드인, 프랑스인, 벨기에인, 영국, 독일인이 합쳐진 국제 공동체로 30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고 또 사도직도 번창하게 되어 오늘날에는 국제 학교, 6,300명 학생의 대학교, 사범학교, 산코쵸, 오바야시, 수소노와 삿뽀로의 중등학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의 인구는 일본 인구 중 1% 보다 적지만, 지적이고 영성적 특징을 지닌 가톨릭 교육은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1967년 총회 이후부터 교회와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의 사도직이 다양해 지기는 하였지만 창립 시초부터 형식 교육은 우리의 주된 사도직이었습니다. 상담, 피정, 증가하고 있는 이주민들에 대한 사도직, 노숙자, 병들고 연로한 사람들,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사도직 등 생명을 양육하는 여러 방법들을 찾는  모색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1939년 영국 관구로부터 설립된 인도 관구와, 1989년 모원으로부터 시작된 인도네시아를 제외하고, 일본은 실로 아시아라는 나무의 줄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계속 투입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일본인, 한국인, 필리핀인 성소자가 생겨났고, 일본에서 1926년 중국으로 가지를 뻗어나갔고, 1956년에는 한국으로,  중국에서 1952년 추방된 지 8년만인 1960년에는 대만으로, 그리고 1969년에는 필리핀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긴 시간 동안 국제성은 우리 공동체의 강한 특징이 되었고, 이 국제성이 성심수녀회의 다른 지역과도 가까이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브리짓 키요 (1909-2007) 수녀님은 그분 특유의 비전과 ‘회원 원정’으로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키요 수녀님은 다른 지역의 성심수녀회 회원들이 극동으로 와서 성심수녀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사실 1908년부터 적어도 23개국 출신의 200여 명의 회원들이 일본 관구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한국, 대만, 필리핀이 설립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됨에 따라, 각각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인적 교류와 재정적 지원이 있었지만, 일본 관구는 각 나라의 고유함을 존중하며, 다음 세대의 성장을 조용히 지켜 보는 할머니 같은 존재로 멀리서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100년이 된 일본 관구는 역사의 새로운 시점에 와 있습니다. 2008년 1월 18일, 100주년 기념 미사에서 코코 나가노 수녀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00살이 된 사람이 자신의 나이에 맞게 살듯이, 지난 100년 동안 일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업적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 왔는데, 이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젊었을 때 초창기 수녀님들의 깊은 신앙과 활동적인 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비그리스도교 국가인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도 우리가 받은 바를 나누려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 재해나 전쟁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빠른 변화와 수녀님들의 연로화 때문에 약간 정지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더 관상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성심수녀회의 역사가 약간 속력이 떨어지는 시기에 와 있지만,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들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넘치는 희망과 신뢰를 두고 있으며 찬미의 마니피캇을 부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눈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고, 예수 성심의 영광을 위하여 더 큰 신뢰와 감사함으로 일하도록 합시다.”

일본 밖에서 나와 중국으로 진출한 첫 시도는 1926년이었습니다. Mary Sheldon 수녀님을 비카 (관구장)으로 모시고 극동관구가 처음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상해의 프랑스 거주 구역에 우리는 국제학교, 초등학교, 중등학교와 오로라 여자 대학을 같은 학교 부지에 두고 개교하였습니다.  중국의 성심회수녀회는 중일 전쟁을 겪었고 (1937-1945), 중국 공산당이 땅을 몰수할 때까지 불안이 계속되었는데 수녀들은 1952년까지  강제 출국 당했습니다.  2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성심수녀회가 상해에 있었는데 60여 명의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봉사했고 26명의 중국인이 성심수녀회로 입회했습니다. 그 후 2007년까지 25년 동안, 브리짓 키요 수녀님을 포함하여 수십 명의 성심수녀회 회원들이 여러 대학에서 영어나 일어, 혹은 문학을 가르쳤으며 신학교나 교구 수도회들의 양성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닐라에 소피아 하우스가 중국인 학생들을 위해 있으며 한국에는 중국인 수련자들이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씨앗이 새롭고 예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1939년 영국관구 수녀님들이 인도에 진출하였습니다. 네 명의 첫 그룹 수녀님들은, 문바이에 대학을 시작해 달라고 문바이 대교구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입국했습니다. 이 대학을 설립한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이런 대학이 없으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회교 여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위한 교육 시설을 제공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개교 초기부터 영국 수녀님들은 인도 문화에 대해 지식을 심화하고 그 문화의 진가를 인식하도록 학생들을 격려했습니다. 1956년에 뱅갈로에 수련원을 개원하였습니다.

토착화는 인도 관구에게 큰 도전이 되는 주제였습니다. 1969년 인도 교회가 전국 단위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인도 교회의 토착화가 가장 우선 논의되었습니다. 수련원은 1969년 3월에 곧 뱅갈로에서 문바이로 옮겨졌는데 인도의 영성은 양성 프로그램 안에 통합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요가 등 인도식의 기도 방법, 다른 종교 전통에 개방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양성프로그램에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1972년 반다나 수녀님은 다른 몇몇 수녀들과 푸네의 Wantage 수녀회 수녀님들과 초 교파적인 아쉬람을 시작했고, 후에 힌두인들의 순례 장소인 리쉬케쉬에 다른 아쉬람을 시작했습니다.

인도 관구는 수도생활이 토착화되기 위해서는 인도 언어들을 아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유기서원자들은 수련원에서 나오자 마자 언어 공부를 하도록 보내졌습니다. 유기서원자들은 비그리스도교 기숙사나 일반 가정에서 사는 경험을 하도록 허락이 되었습니다. 봉쇄가 풀리면서 인도 언어에 대한 지식과 사람들 가운데 가까이 사는 공동체에 살지 않겠느냐는 초대가 교회의 토착화 노력에 새로운 추진력을 주었습니다. 인도 언어를 알고 서구화에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25년 동안 농촌 지역에서 성소자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문화와 영성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인도 성심수녀회의 얼굴을 점차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중국에서 추방되어 한국으로 주데레사 수녀님이 첫 교장으로 부임해 온 이래 50년이 막 지난 한국 관구는 60여 명이 넘는 회원이 있습니다. 1975년에 지구로 독립하면서 한국에 수련원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  수련장이었던 김재숙 수녀님은 3개월이나 불교 선원에서 지내면서 수련장직을 준비하였는데 그것이 성심수녀회의 영성과 실천을 토착화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관구는 피정 집, 대학교육, 여자 중.고등학교 , 단기 장기 쉼터, 공부방들을 통한 대안적인 교육,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사도직 뿐 아니라 유기농 공동체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관구는 민주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여성 들의 신학적 성찰을 도우면서, 또 교회와 한국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지도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을 통해, 또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위한  3일, 8일, 40일 피정 지도를 통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 왔습니다.
벤지거 수녀님이 타이페이 외곽 언덕 위에 대만 성심회를 시작했습니다.  6명의 설립자 중에 4분이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루시 후, 로즈 첸, 메리 유엔, 로즈 순이 그분들이십니다. 대만 사람들은 종교적 심성이 강합니다. 주로 불교, 도교나 토착 종교, 그리고 유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이며 가톨릭 인구는 1% 정도입니다. 첫 10년 동안은 대만 국가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성심수녀회는 같은 구내에 지역 사람들을 위해 고등학교, 초등학교를 개교하였고, 국제 학교와 작은 대학도 열었습니다.  그러나 대만이 1972년 유엔으로부터 탈퇴하고 그에 따라 외교 사절과 외국인들이 철수함에 따라 새로 개교한 대학과 국제학교의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녀 공학인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는 계속 성장하였습니다. 대만 성심수녀회가 시작된 이래, 평신도들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데, 그들은 성녀 마들렌 소피의 교육적인 비전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모색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성에 목말라하기 때문에 학교 교정에는 피정 센터를 열었습니다. 인근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본당도 가지고 있으면 몇몇 회원들은 상담이나 인성 발달을 위해 워크숍을 주기도 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회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 사목적 필요가 많은 중국 본토에서 피정과 워크숍을 요청 받기도 합니다. 1990년 대만은 지역 (에어리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열명의 회원이 세 나라에 퍼져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성소를 보내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필리핀 지구와 한국 관구의 도움으로 성소가 커 나가고 있습니다.

필리핀 지구는 일본을 발판으로 하여 극동관구에 의해 세워졌는데, 일본에서 처음 열 명의 필리핀 수녀님들이 입회를 하여 초기 양성을 받았습니다. 1969년에는 두 명의 필리핀 유기서원자와 한 명의 미국인 수녀님이 일본 관구로부터 필리핀에 성심수녀회를 시작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필리핀 지구를 설립한 비전은 사람들과 삶을 함께 나누며, 특히 대학교 학생들을 염두에 두며, 기존 세상의 기관 안에 스며 들어 가서 사는 유동적인 그룹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우리 소유의 기관 안에서 살고 일하는 다른 나라의 전통적인 접근과 달리 급진적으로 차별화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나중에는 에어리어가 되었고 1987년 1월 1일에는 지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섯 공동체가 있으며 몬탈반, 올목, 카타르만 세 군데에서 사도직을 시작했습니다. 이 세 곳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은 이 사도직들이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이며, 가난하며, 공동체를 바탕으로 하고, 지구 내 다른 회원들과 또 평신도 협력자들과의 협력을 증진시키려는 프로젝트라는 점입니다. 일본 성심학교 동문들과 성심학생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사도직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 오고 있습니다.

성심수녀회가 인도네시아로 간 것은 수녀회를 시작할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가 아니라 필리핀 뒤셴 수녀님의 시성식에 즈음하여 총참사들에 의해 하나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2억이라고 하는 세계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300여 인종과 250개 다른 언어와 17,000개의 섬이 3,500 마일 길이의 이 나라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깊이 종교적인 국가인데, 85%가 회교 신자이고(세계 최대 회교 인구) 5%가 가톨릭, 5%가 개신교이며 나머지 5%가 힌두교나 불교입니다. 비록 회교가 우리 수녀회가 위치한 자바 북부를 포함하여 전역에서 압도적인 종교이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이 인도네시아 헌법에 정해진 기본적 원칙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인도, 일본, 미국 국적의 다섯 명의 종신서원자와 다음 종신서원 수련에 가게 될 인도네시아 인 유기서원자 한 명과 두 명의 수련자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동티모르에서 온 청원자 등, 아홉 명으로 구성된 에어리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령대는 20대에서 80대이며, 이들은 인도네시아 맥락에서 우리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우리 수녀님들은 내적 생활과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강조하는 우리의 영성과 아주 가까운, 인도네시아인들의 깊은 종교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일들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데, 더 세속적인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곳 수녀님들은 가톨릭, 회교, 국립 교육 기관에서 가르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일하고, 또한 기도와 상담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교구의 삶에 참여하고, 회교, 기독교 간의 종교 대화에도 관여하고 있으며, 손님을 맞아 들이고, 그 외의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녀님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이 운영하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일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문화 간의 대화는 국제 양성 프로그램이나 다른 나라로부터 온 많은 이들을 환대하고, 매일의 공동 삶을 함께 사는 것을 통해, 국가의 경계를  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시아 지역 수녀회 설립 초창기의 국제성은, 각 나라에 성심수녀회를 설립한 것 뿐 아니라 그들의 국가적인 정체성을 세울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습니다. 최근까지 학생들 교류나, 몇몇 워크숍, 또는 유기서원자들의 국제 체험 외에는 각 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문화가 너무 다른 점들, 지리적으로 너무 멀다는 인식이 강해 공통적으로 함께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각 나라가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유대를 강화하고 싶다는 갈망이 커져 가고 있습니다.

2007년 9월 아시아 관구장들의 모임은 하나의 전환점이었고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코코 나가노 수녀님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국경과 문화, 종교, 국가적 상황을 넘어 우리의 차이점으로부터 배우고 우리가 아시아인으로 가지고 있는 공통 영성을 재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세상이 점점 작아지면서, 우리의 관계도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초창기 일본에 성심수녀회를 시작하기 위해 많은 나라로부터 선교사들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제는 아시아의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다시 하나가 되어 국제 성심수녀회를 풍요롭게 하고 더 살아 있게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낍니다.”

아시아 대륙이 점점 지구촌에서 중요하게 되고 있는 이 때 성심수녀회 아시아 지역은, 국민들의 필요에 관대하게 응답하려고 열의에 차 있으며, 새로운 희망으로 국제 성심회를 축복하는 가운데 미래를 향하여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다.

첫 편지와 성심 국민 학교

서울에서 성심수녀원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이 수녀원을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께 의탁하면서 ‘천상의 모후이신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정하였습니다. 복녀 필리핀 뒤셴께서 보시면 이 시작이 플로리센트와 세인트 찰스의 경험과 비슷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중반에 이토록 단순하고 토속적인 삶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치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으로 가난한 여인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의 초대 주교이신 노기남 주교님께서 1955년 7월에 공식 초청을 하셨는데, 그것은 성심회 초창기 수녀들이 들으셨던 부르심과 같았습니다. 관구장이 미리 두 번을 방문하면서 파리외방 선교회 신부님들이 주신 집을 수녀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이전에 신학교로 쓰이던 건물의 일부입니다. 아주 가까이 신부님의 본부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1925년 7월, 78명의 동료들과 함께 시복된 한국 첫 사제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를 모셨는데, 그분은 1846년에 치명하신 분입니다.

1958년 8월부터 건물의 복구와 개조가 시작되었습니다. 10월 첫 금요일에 수녀들이 들어오셨는데, 처음에는 우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기거하셨습니다.

10월 27일 첫 원장으로 매카디 플린트(McHardy Flint)수녀가 임명되었는데, 그분은 일을 돌보는 분들과의 언어 소통에 어려움은 있었으나 독창적인 방법으로 의사 소통을 잘 해내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교회 단체, 교회 당국, 막 진출한 예수회의 협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분의 귀중한 협조자를 채용하였는데, 그 중 한 분은 영어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통역, 심부름 그리고 남자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시는 분들을 위해 운전해 주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봉쇄구역 밖에서 두 분의 보조 수녀들을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첫 사도직은 개인 수업으로 시작되었는데,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성심회의 첫 교육 사업은 극동 지역의 관습대로 1957년 4월에 시작될 것입니다.

총원장 수녀님, 이렇게 멀리 있는 가족들을 강복하여 주십시오. 아마도 총원장 수녀님은 성심회의 벤자민 같이 우리를 어루만져지는 특혜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수녀님과 아주 가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1956년

한국 성심공동체

박정자 수녀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전도 4, 1-2).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해진 때에 따라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일부가 뽑혀지는 힘겨운 줄다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1974년 겨울, 국민학교 교장의 책임을 맡아 달라는 장상 수녀님의 제안을 받았다. 종신서원 직후 아직 서원의 열기가 불타고 있는 때였지만 쉽게 응답할 수 없는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기도해 보라는 수녀님의 말씀이 죽기까지 순명하겠다고 공표한 나에겐 결정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흔쾌히 대답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아쉬움의 양면 감정을 느끼면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75년 2학기에 한순희수녀님의 뒤를 이어 국민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350여명의 학생들과 5명의 담임선생님, 서무과 직원 1명, 그리고 등사실 직원 등 모두 9명의 교직원이 당시 성심국민학교의 전 가족이었다. 그것도 1976년부터는 유일한 남자였던 서무과 직원마저 사임하게 되어 여자 일색의 학교가 되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학교장이 전교생의 일기 지도를 할 수 있는 학교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가 어찌나 청결하게 청소되어 있었던지 장학사가 신발을 벗어 들고 교장실까지 오게 되어 당혹감을 느낀 적도 있다. 때론 장난이 지나친 어린이가 교장실까지 인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장 수녀님, 잘못했어요” 하며 빠질듯이 쳐다보는 맑고 까만 눈을 대하게 되면 야단은 커녕 그저 성큼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할 것인가를 조금 실감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학교도 엄연한 사회로서 의도적인 학업 뿐 아니라 다양한 만남을 통해 사회 생활을 배우며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성숙시켜 가는 중요한 장으로 생각할 때, 성심의 작은 규모 그리고 여자 일색으로 제한된 분위기는 바람직한 교육 조건에 부족함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또한 일정한 계층만의 또래집단 같은 특수성이 형성되어 사회에서 약간 배타적인 인상을 주게 되는 점 역시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소수의 학생으로 운영해야 하는 재정적인 문제도 안고 있었다. 이에 성심수녀회가 교육의 문호를 사회에서 작은 이들을 포함한 일반 대중을 향하여 개방해야 한다는 방향전환의 시도가 더해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길을 찾으라는 모원의 권고가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우리를 움직인 요인들이었다.

국민학교, 국제학교, 중학교의 폐교가 수많은 논의와 식별을 거쳐 결단에 이르게 되었다. 성심의 교육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고등교육을 지속할 것이 선탣되었다. 가치관 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뜻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어려운 결단을 냐기게 하였다.

1976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우리의 결정이 학부모님께 공표되었다. 준비없이 이 소식에 접하게 된 학부모님들의 반응은 기름붓고 불지른 듯한 놀라움과 당황함이었다. 특별대책위원회가 급히 소집되었다. 당시 지구장이셨던 김재숙 수녀님과 함께 대책 위원들과의 모임을 갖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단 한마디 ‘명년 봄에 신입생 모집 안함’이라는 말만이라도 취소헤 달라고 하였다. 일어섰다, 앉았다, 책상을 치며 큰소리를 쳤다, 달랬다 하던 당시의 모습은 이성이 제대로 작용할 수 없었던 감정의 폭로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분위기 자체로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여지도 있었지만 나의 마음을 건드리고 아프게 했던 것은 학부모님들을 통해서 느껴져 온 성심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신뢰와 사랑에 상처를 준 것이 송구스럽고 마음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하셨지만 이런 최악의 경우가 되도록 미리 대처하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의 잘못이요 불찰이니 재고해 주시면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간곡한 부탁은 차라리 애원에 가까운 것이라고 느껴졌다. 수녀회에서 다시 논의해 보기로 합의함으로써 첫 모임을 끝냈다.

긴급 수녀회의를 소집하여 각 개인의 의견에 대한 재확인을 한 결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의 결정을 되물리 수 없다는 의견의 합의를 보았다. 재정보다는 성심회의 방향 등의 다른 요인들이 결정에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수녀회의 결과를 알라기 위하여 대책위원회 회장님을 만나야 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수녀회의 결정을 전달해야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등등의 긴장과 초조함에 약속시간까지의 이틀을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보냈다. 미리 너무도 걱정하고 고심한 탓인지 막상 시간이 되었을 때에는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한 심정으로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다는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학교를 계속 할 수 없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드리며 재정은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씀드렸다. 조용히 설명을 들으신 회장님은 의외로 “수녀님, 수녀님들의 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집에 가면 팔에 매달려 ‘아빠,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만은 문을 닫게 하지 말아 주셔요.” 라고 애걸하는 두 딸을 볼 때는 마음이 미어집니다.”하시며 고개를 떨구셨다. 성심에 대한 지극한 사랑,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었다. 성심을 아끼는 모든 분들께 못할 짓을 하는 듯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의 요구가 분명하였다. 그러면서 이 소요 속에서 예수성심께서 함께 하고 계심도 체험할 수 있었던 은혜로운 시기였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다.(전도. 311)’ 라는 말씀이 지금에 와서는 보다 힘있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여려운 때였지만 성심인 모두의 사랑을 재확인한 소중한 계기였으며, 성심의 진실하신 사랑이 드러난 은혜로운 때로서 감사드릴 수 있는 때라고도 생각된다. 참으로 제 때에 알맞게 맞아들어간 때라고 확신하게 되는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지금은 사방에 흩어져 살지만 성심국민학교 동창들은 지금도 내 마음 안에 성심가족으로 늘 남아 있으며, 우리 모두가 성심의 사랑받는 딸들로서 계속 성숙되어 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 글은 한국 진출 35주년 기념책자 ‘예수성심의 영광을 위하여’에 있습니다.

예수 성심 성당

조선땅에서 신학생 교육을 위해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북 제천에 자리잡은 성 요셉 신학교 즉 ‘배론신학당’이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폐쇄 당하였고, 1885년 경기도 여주군 부엉골에 신학교가 다시 개교되었다. 한국교회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 후 파리외방전교회가 1886년 순교지로 이름난 한강 새남터 서북방에 위치한 용산 함벽정 일대의 땅을 매입하고,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교명을 ‘예수성심신학교’로 개칭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첫 서양식 교사 건물은 코스트(E.Coste)신부의 설계와 감리로 1892년 6월 완공되어 소신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960년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구 용산 신학교 건물은 1911년 12월 완공되어 1942년 2월 16일까지 대신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조오지아풍으로 장식된 2층 붉은 벽돌 구조로 사적 제 52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1956년 10월부터 성심수녀회 수녀원으로 사용하여 현재 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과 성심기념관 및 역사 자료실로 사용하고 있다.

신학교 성당으로 지어진 원효로 예수성심성당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다수 순교자들이 처형당한 새남터가 내려다보이며, 당고개 순교지가 건너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종현(명동)성당과 약현(중림동)성당을 설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성당은 1899년 기공하여 1902년 완공되었다.

예수성심성당은 붉은색과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조적조 양식으로, 뽀족 아치로 된 창문이나 지붕 위의 작은 첨탑이 있어 전체적으로 역식화된 고딩풍의 외관을 갖추고 있다. 성당 내부는 제단과 예배석만 있는 단순한 성당 형식으로, 출입구 위쪽 2층에는 성가대석이 있다.

원래의 색유리창은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며 현재 있는 제대 북쪽 색유리창은 1984년-1985년 이남규 작가가 제작한 것이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당시 신학교 성당인 이 예수성심성당에 1901년에서 1960년까지 안치했었는, 1960년 신학교를 혜화동으로 이전하면서 옮겨졌다.

현재는 성심수녀회와 성심여중고 학생들의 전례와 기도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적 제 52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마들렌 소피 바라

msb2성심수녀회 창립자 성녀 마들렌 소피 바라(Madeleine Sophie Barat)는 1779년 12월 12일 프랑스 브르고뉴 지방의 주앙니 마을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바라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소피는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교양을 지닌 어머니에게 정서적 영향을 받았으며, 마을의 중학교 교사였던 오빠에게서 엄격하고도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 소피는 소녀 시절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수 성심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다. 16세 이후에는 파리에서 젊은 여성들과 함께 사제가 된 오빠에게 신앙교육과 인문교육을 받았으며 급변하는 사회 상황에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필요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소피는 1800년 11월 21일 파리에서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첫 서원을 하였는데, 이로써 성심 수녀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1801년에는 청소년 교육을 통해 예수 성심의 사랑을 알리고자 아미앵에 첫 성심학교를 열었다. 혁명기의 여파로 인한 혼란이 수녀회를 끊임없이 위협했으나 한결 같은 확신으로 교육철학을 확립하고 시대에 맞추어 교육방법을 새롭게 변혁시켜 나갔다. 소피는 1865년 5월 25일 파리에서 85세의 아름다운 삶을 마치고 하느님 품에 영원히 안기게 되었다. 이후 1908년 5월 24일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4일에 시성되었으며 현재 소피의 유해는 파리의 프란시스 하비에르 성당에 모셔져 있다.

주와니(Joigny) – 소피 수녀님의 출생지

프랑스 부르군디 지방 주와니는 성심수녀회의 중요한 장소이다. 그곳은 성심수녀회의 창립자 마들렌 소피이 바라가 1779년 12월 12일 태어났으며, 소피이는 예정보다 2개월 일찍 태어나 너무연약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집 근처 생 티보(St Thibaux)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소피이의 아버지는 자크 바라(Jacques Barat)로 포도 경작인과 술통 제조자였다. 소피이는 주와니의 포도밭과 언덕, 욘(Yonne)강을 따라 자리 잡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났던 3, Rue Davier에 위치한 집은 현재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영성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소피 영성 센터는 전세계에서 오는 성심회 수녀 뿐만 아니라 동문, 협력자, 성심학교 교사 및 학생등이 와서 피정, 워크샵등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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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들렌 소피 바라 기도문

성녀 마들렌 소피여,

오늘 저희가 이렇게 함께 모임에,

저희로 하여금 당신이 닦으신 오솔길을 따라 걷는

참된 후배가 되도록 도와주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공동소명에 맞갖게 응답하게 하시고

참으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저희를 이끄시어

그리스도인 생활의 근원에로 돌아가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주님의 사업을 완수하게 하소서.

또한 성심의 깊은 사랑을 배워 실천하게 하소서.

그 사랑이 곧 인간 안에 계신 하느님 현존의 표지이옵니다.

저희를 화해에로 이끄시어

주님 안에서 받은 저희의 소명이 하나 되게 하소서.

저희의 공동체들이 사랑과 일치의 표지되게 하시며

개개인의 다양한 소중함을 받아들이고 살리는

사랑의 터전이 되게 도와주소서.

저희는 목적지를 알고 있는 나그네요

순례자임을 항상 기억케 하시어

여로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결코 낙오함 없이

동행들과 더불어 끝내 기쁨 중에 여행하게 하소서.

마침내 저희를 진지한 기도생활과

세상을 보는 관상적인 안목과

참된 인간관계에로 이끄심으로써

저희의 삶이 보람되고

저희의 일치가 진실 되게 하소서.

아멘.




자넷 스튜어트

자네트 어스킨 스튜어트(Janet Erskine Stuart, 1857-1914) 수녀는 1857년 11월 11일 영국 러트런드 지방, 코테스모어에 있는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은 마지막 목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오빠의 말을 듣고서, 자네트는 열세살의 나이에 진리를 찾기 위한 고독한 탐색을 시작했다. 최종 목적을 찾기 위한 탐색은 7년이 걸렸으며, 21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그녀를 가톨릭 교회로 인도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1882년 자네트는 런던 외곽, 로햄튼에 있는 성심수녀회에 입회하고, 거기서 30년간 수도생활을 하게 된다. 종신서원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장직을 맡게 되었으며, 1894년 원장이 되었다. 17년 후, 1911년에 성심수녀회 제 6대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총원장 재임 기간 동안, 스튜어트 수녀는 수녀회의 모든 수녀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알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성심수녀회의 모든 공동체를 방문했다.

자네트 스튜어트 수녀는 그녀의 저술을 통해 현 시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심수녀회 수녀들뿐만 아니라 다른 수녀회의 수녀들, 그리고 영적 성장과 교육에 헌신하는 많은 개인들이 그분의 강의, 저서, 수필, 시를 통해 영감을 받고 있다. 저서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생명의 여인으로 키우기까지, The Education of Catholic Girls, 1912>가 있으며, <성심수녀회 The Society of the Sacred Heart, 1914>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하는 배 위에서 집필한 작은 책자이다. 사후에 출간된 글모음으로 <영성생활의 한길과 뒤안길, Highways and Byways of the Spiritual Life ,1923>과 <신앙 속의 기도, Prayer in Faith, 1936>가 있다.

스튜어트 수녀는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지 몇 달 후 1914년 10월 21일에 선종했다.

뛰어난 교육학자이자 총원장이셨던 자네트 스튜어트 수녀님은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교육정신을 자신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려는 줄기찬 노력을 하시여 성심교육정신의 생생한 숨결을 발견하고 나아가 우리 시대에 알맞는 성심교육정신의 재해석과 그 새로운 적용이라는 도전을 하였다. 그래서 2014년, 스튜어트 수녀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 성심화원들은 수녀님의 정신을 기리며 수녀님을 통해 이 시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찾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Spirit seeking light and beauty

– 자넷 스튜어트

빛과 고움 찾는 한얼,jan2

안식 그리는 영혼,
이해 받기 바라는 맘,
축복의 길 하나뿐.

온갖 기쁨, 아름다움,
세상 복락 스러지니,
뵈지 않는 영광만을

한결같이 관조하리.

넓고 넓은 창조세계
하염없이 헤매도
너의 갈망 채우실 분,
고향이신 하느님뿐.

듣고 보고, 느껴 맛봐
감추인 손길 바라며,

어둠이 가리어도
믿음 사랑 깨닫네.

만물 아끼시는 주님
우리 마음 아시니.
그늘진 땅 가로질러
영복으로 이끄소서.

– Janet Erskine Stuart, RSCJ

Spirit seeking light and beauty,jan2

Heart that longest for thy rest,

Soul that askest understanding,

Only thus can ye be blest.

All the joy and all the fairness

Fade away from earth’s delight

By the steadfast contemplation

Of the glory out of sight.

Through the vastness of creation

Though your restless thought may roam,

God is all that you can long for,

God is all His creature’s home.

Taste and see Him, feel and hear Him,

Hope and clasp His unseen hand;

Though the darkness seem to hide Him,

Faith and love can understand.

God, Who lovest all Thy creatures,

All our hearts are known to Thee,

Lead us through the land of shadows

To Thy blest eternity! 

 

The education of catholic girls

The education of catholic girls  생명의 여인으로 키우기까지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성심 교육-

Janet Erskine Stuart, RSCJ

최임수 옮김

이 책은 1912년 영국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이후 1964년 미국에서 재출판되었습니다. 성심회의 뛰어난 교육학자이자 총원장이셨던 자넷 스튜어트 수녀님은 이 책을 통하여 성녀 마들렌 소피의 첫 교육정신을 자신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려는 줄기찬 노력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비록 그 교육적 배경이 우리의 시대와는 다른 것으로서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과 오늘이라는 시대의 격차가 있으나, 우리는 여전히 이 책에서 성심교육정신의 생생한 숨결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에 알맞는 성심교육정신의 재해석과 그 새로운 적용이라는 신선한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여인으로 키우기까지, 한국어판을 펴내며(11쪽)

차례jan3

책머리에

한국어판을 펴내며

1. 종교

2. 인격 1

3. 인격 2

4. 가톨릭 철학의 요소

5. 삶의 현실

6. 학습과 놀이

7. 수학과 자연과학, 자연학습

8. 영어

9. 현대 언어

10. 역사

11. 예술

12. 예절

13. 여성의 고등교육

14. 결론

펴낸곳 : 성심수녀회 소피의 방

펴낸날 : 1999년 5월 25일

경탄하올 성모님

MATER ADMIRABILIS 성화의 유래

(1844.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dei-Monti) 수녀원.로마)

이 성화는 현재 로마의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 높이 솟아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dei-Monti)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수도원은 15C 역대 프랑스 왕의 관대한 원조를 받아 작은형제회(은수회) 창설자이신 성 파올라의 프란치스코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1828년 교황 레오 12세의 의향에 따라서 성심수녀회에 기부되어,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dei-Monti)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빛내는 청소년 교육의 중심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버팀이 되는 마리아의 성소(聖所)가 되었다.

1844년 성심수녀회의 청원자였던 젊은 폴린 페르드로는 당시의 원장이셨던 꼬리오리 수녀에게 수녀원을 향하는 2층 복도의 벽에 성모님을 그리고 싶다고 청하였다. 폴린은 프레스코의 특수 기술도 모르면서 온 힘을 다하여 일을 시작하였다. 경험이 없던 이 젊은이가 성모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동안 벽면이 13시간 동안이나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폴린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성모의 보호를 게을리 하지 않고 구한 바에 대한 특별한 도움을 나타내는 ’작은 기적’이었다고 여겼다.

그 해 7월 1일 그림은 일단 끝났으나, 프레스코의 색채가 예상보다 너무 선명하여 커튼 뒤에 숨겨 두어야만 했다. 그 결과 프레스코는 서로 작용하여 현재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 그림은 1846년 10월 20일까지 「백합의 성모」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었다. 1846년 10월 20일, 교황 비오 9세께서 수녀원을 방문하시어 이 그림을 보시고 “이 분이야말로 「가장 경탄하올 어머니」이다.” 라고 칭찬하신 이래로 이 그림은 「경탄하올 어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이 성모님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말을 못하던 성모성심회의 부랑뺑 신부는 이 성모님께 9일 기도를 바친 후에 잃어 버렸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후, 교황 비오 9세는 이 성화 앞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다음 해 10월 20일은 「경탄하올 어머니」의 축일로 제정해 주셨다. 그 후 많은 순례자들이 이 성화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심수녀회의 창립자인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와 성 요한 보스코, 성녀 소화 데레사, 성 비오 10세, 복자 빨로띠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순례자들이시다.

경탄하올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성심학교 학생들의 기도- 

백합같이 순결하신 어머니,

어머니의 소박하고 온유한 마음의 빛이

저희 마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 주시어

어른이 되어 가는 길에서 겪는

아픔과 걱정을 통해 성장하게 빌어주소서.

깊이 생각에 잠기신 어머니, khs2

바쁘고 어지러운 일상생활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

어머니처럼 침묵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워

진리와 정의를 분별하는 젊은이 되게 빌어주소서.

꾸준히 일하시는 어머니,

이웃과 세상을 위해 좋은 일에

재빠르고 부지런히 일하게 하시고

드높은 이상을 품고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경탄하올 성심인의 어머니,

저희는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하고

사랑스런 존재임을 늘 기억하게 빌어주소서.

아멘.

성심학교의 주보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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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성심학교에는 「경탄하올 어머니」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그 이유는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께서 이 성화의 젊은 성모님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화 「경탄하올 어머니」가 몸으로 나타내는 큰 은혜는 내적 생활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손을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놓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조용히 생각하는 모습 전체가 이를 말해 준다. 마리아 곁에 있으면 주위의 번잡함도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은 조용히 하느님 안에 쉴 수 있게 된다.

내적 생활과 함께 「경탄하올 어머니」가 가르치는 또 하나의 은혜는 마리아 옆에 세워 놓은 실꽂과 발치에 놓인 바구니가 상징하는 일이다. 그 바구니 위에는 읽고 있던 성서가 놓여 있다. 즉, 마리아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학문과 일도 동시에 사랑했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일한다는 기본적 태도를 성모님에게서 배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꽃과 정의의 태양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는 샛별을 볼 수 있다.

전망은 이런 삶 속에서 일기 시작한다

전망은 이런 삶 속에서 일기 시작한다.

마치 한 여인이 조용히 걸어 나와khs4

방안의 논쟁과 허튼 소리를 뒤로하고

부엌에 앉아 그녀의 무릎 위에 끌어당긴

털실 꾸러미, 옥양목과 벨벳 조각들을

등잔불 아래 무지개 빛 작은 덮개가 깔린

잘 닦인 식탁 위에 무심히 옮겨놓고…

이런 모습은 영원함과 무관하다

위대함을 얻으려는 투쟁이나 휼륭한 업적도 아니며

오직 마음속 깊은 명상으로

그녀의 몸과 하나 된, 조용히 밀어 올리는 숙련된 손가락

명백한 것들을 거슬러 어렴풋한 것들을, 거칠음을 거슬러 부드러움을

지배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다만 보살피는 마음으로…

-아드리엔 리슈 Adrienne Rich-

필리핀 뒤셴

성녀 로즈 필리핀 뒤셴 St. Philippine at Villa Duchesne

필리핀 뒤셴은 1769년 8월 29일에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태어났다.
20세 되던 해에 ‘방문회’라고 하는 수녀회에 입회를 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이 수도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그러던 중에 1801년에 필리핀 뒤셴은 ‘생트 마리 당 오(Saint Marie d’en Haut)’수도원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바로 이곳에서 우정과 사랑을 나눌 벗, 바라 수녀와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필리핀 뒤셴은 성심회 수녀가 되었다. 필리핀은 입회 이후 기도 중에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선교로의 부르심을 들었으나, 총원장이었던 바라수녀는 그를 격려하면서도 기다리게 했다.

1818년, 미국의 루이지애나의 뒤브르 주교가 성심회 수녀의 파견을 요청함에 따라 필리핀의 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필리핀 뒤셴을 선두로 하여, 5명의 수녀가 고된 여행을 마치고 뉴올리언즈에서 배를 내렸다. 미국에서의 첫 공동체의 시작은 무척 힘들었다. 세인트 찰스에서, 플로리쌍에서 이 작은 공동체는 배고픔과 추위, 혹독한 날씨 그리고 고된 노동, 전염병 등으로 많이 고생하였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젊은이들은 성심회에 입회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필리핀 뒤셴과 그 동료 수녀들의 삶에서 풍기는 기쁨과 아낌없는 투신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뒤셴 수녀는 틀에 박히지 않은 자기 헌신과 활력을 보여 주었다. 집 안이나 정원에서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밤에는 공동체와 기숙사의 일들을 정리했다. 아주 엄격하게 모든 것을 절제했다. 학식이 깊고 총명한 여성이었음에도 영어를 말하는데는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41년 6월 말에야 ‘포타와토미’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오랫동안 그의 마음 안에 간직해 왔던 바 즉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하였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연로해져서 슈가 크릭(Sugar Creek)에서 1년 밖에 머물지 못하였다. 작은 성당에서 늘 오랫동안 기도하곤 하던 필리핀 뒤셴 수녀를 인디언들은 ‘늘 기도하는 여인’이라고 불렀다.

1852년 11월 18일 미국의 세인트 찰스(Saint Charles)에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로즈 필리핀 뒤셴은 세인트 루이스 제퍼슨 기념관 현판에, 그 이름이 “지워져서 안될(must not wither)” 개척자 여성들 중 한분으로 기념되어 있으며, 또한 미조리주 세인트 찰스에 그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940년에 시복 되었고, 1988년 7월 3일에 시성되었다.

고통과 오해 앞에서도 용기 가득하셨던 개척자시여,

저희에게 굳건함을 허락하소서.

우정에 있어서 겸손하고 뜨거우며 사심이 없으셨던 분이시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스도 왕국을 위한 투쟁에 지치지 않으셨던 분이시여,

저희에게 당신의 열정을 주소서.

살아 계신 기도의 교훈이시여,

강생의 영성과 파스카 신비를 살게 저희를 도와주소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도록 선교사들의 마음을 북돋우시는 분이시여,

하느님 나라를 위한 당신의 열정을 허락하소서.

하느님의 때를 인내롭게 기다리신 분이시여,

저희에게 희망을 가르쳐 주소서.

인디언들을 위한 투신에 항구하셨던 분이시여,

저희 마음을 형제자매들에게 열어 주소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를 조배하는데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분이시여,

저희에게도 당신처럼 제대 위의 성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주소서.

새로운 세계로 향하셨던 개척자시여,

가난한 이를 참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가난과 전적인 헌신의 모범이신 분이시여,

저희도 자신을 잊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소서.

성녀 필리핀 뒤셴이여,

아낌없이 당신의 삶을 바치셨던 예수 성심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Maria Cacilia Amaranta, RSCJ (성심수녀회 브라질 관구)

김수환 추기경 (성녀 로즈 필리핀 뒤셴 기념 미사, 1988. 11. 17)

성 로즈 필리핀 뒤셴(Rose Philippine Duchesne)이 누구인지,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지만, 1840년에 한국의 교회와 신자들이 모진 박해하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한국을 지망했다는 말을 듣고 친근감과 동시에 그분의 전 교회에 대한 사랑과 인류 복음화에 대한 열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 필리핀 뒤셴 성녀의 생애를 소개하는 짧은 글을 읽었습니다.

본시 타고난 성품은 의지가 강하고 불 같은 정열을 지녔으며, 초지 일관하는 기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로서 첫 수도회인 성모 방문 수녀회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1789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박해를 받고 수녀원이 해산되는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필리핀 성녀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11년 동안 자신도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으면서도 감옥에 갇혀 있는 신부, 숨어 있는 신부, 병자, 가난한 이들, 또 학교와 고아원이 해산되어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 주고, 위로와 격려, 사랑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과 좌절을 수없이 맛보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성녀의 생활은 그 후, 성심 수녀회의 마들렌 소피 수녀를 알게 되어 성심회에 입회하고 성심회 수녀가 되어 살다가 1818년, 자원하여 미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난한 개척자들 속에서 교육과 함께 자선 사업,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복음 선교 등에 헌신했습니다.

이분은 기가 막힐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계단 밑의 작은 장을 자기 방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오랜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때로는 밤새워 기도하였다 합니다. 인디언들이 밤새며 기도하는 성녀의 치맛자락에 몰래 종이조각들을 올려놓았다가 그것이 아침이 되어도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언제나 기도하는 여인’이라는 칭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성심회는 발전하여 미국 전역과 캐나다, 멕시코 그리고 멀리 뉴질랜드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필리핀 성녀는 이것을 당신의 공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공을 남에게 돌렸으며, 자신은 거듭해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했다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의 겸손, 용기, 극기, 정열, 헌신적 봉사, 기도, 모든 것이 비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그 짧은 전기를 보면 필리핀은 심한 고독감을 체험해야 했고, 끊임없는 실패감에 부딪히며 살았다고 합니다.

왜 그녀는 그렇게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혀야 했는가? 왜 실패감에 부딪히며 살아야 했는가?

신앙인으로서 수도자로서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혀야 했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었는가? 즉,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서, 또는 반대나 오해를 받는 데서 느끼는 고독감이었는가?

열심히 헌신적으로 봉사했건만 결과는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난데서, 아니면 많은 성인들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영혼의 밤에서 오는 고독감이었는가? 또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홀로 사막을 걷는 것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신의 부재(不在)가 주는 고독감이었는가?

저는 성녀에게 있어서 고독은 이같이 인간적인 것이면서 더 깊이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특징은 Fortitude, 곧 용기 또는 불굴의 정신이었고, 이것은 동시에 신앙에서 오는 것이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녕, 참된 신앙은 하느님이 계심에서 시작되지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고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그 고독, 그 실패감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 속에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는 것, 그분에게 여전히 전적인 신뢰를 두는 것,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시 주인은 주님이심을 인정할 때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욥의 경우가 아주 전형적인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친구나 아내까지 등지고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 고독감과 실패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 46)라고 소리치신 그 죽음의 어둠 속에서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녀 필리핀은 바로 이 예수님의 뒤를 그대로 따른 분 같습니다. 그래서 그 짧은 전기에서 말하기를 “이 모든 어려움들은 그녀를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었고, 그녀의 하느님에 대한 열절한 신뢰감은 흔들릴 줄 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갈 때, 이미 그녀를 잘 아는 바랭 신부는 “그녀의 오래된 열성의 불은 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화되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 자기를 포기한 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포기한 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기다···. 이것은 어떤 처지에서도 자기를 찾지 않고 하느님께 자기를 통째로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고 괴로울 때나, 그 밖에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사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모든 것 되심을 의심치 않으며, 그분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분이 주인이심을, 나는 그분에게 속한 종에 불과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신앙이요, 이것이 곧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그렇게 비울 때, 하느님으로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성심회원

김재순수녀님

성심수녀회 관구장 최혜영

사랑하는 김재순 수녀님,

dol2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며 비우고 또 비우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삶의 투쟁을 다하시다가 마침내 하느님 품 안에 고이 안기신 우리의 수녀님! 수녀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가족들, 제자들, 성심수녀들이 수녀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느끼게 해 주셨던 수녀님, 그토록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지만 수녀님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저희들의 마음은 탯줄 떨어진 아이처럼 가슴이 철렁하고 막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성심수녀회의 첫 번째 한국인 회원으로서 수도회의 55년 역사 안에서 큰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저희는 수녀님을 뵐 때마다, 마지막 병상에서까지도 “수녀님은 참 대단한 분이시다”라고 감탄할 때가 많았습니다. 미국 켄우드 수련원 동기들과 그 후 수녀님을 만난 많은 외국의 성심수녀들은 한국하면 김재순, 김재숙수녀님을 떠올리며 안부를 전하셨고, 수녀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기에 얼마나 큰 감사와 자랑스러움으로 마음 뿌듯했었는지요. 성심수녀회가 한국 땅에서 이만큼 뿌리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수녀님의 노고가 얼마가 컸었던가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생활하시며 “하느님만이 전부라는 진리”를 한결같은 믿음으로 보여주셨던 성실한 신앙인이며 수도자의 모범이셨습니다. 멀리 외국을 다녀오셔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하는 분이셨고, 연세가 드신 후에도 수녀들의 전체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곁에 계시기만 해도 든든한 진정한 원로셨습니다. 수녀님의 첫서원 50년을 축하하는 금경축 자리에서 수녀님께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당신의 가족사 안에서 고스란히 끌어안으셔야 했던 고통과 신앙의 갈등을 나눠 주셔서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간 수녀님의 고통이 얼마나 절실했을지 저희로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수녀님의 삶이 정화되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 너그러워지고 평화로와지셨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께서는 어떠한 갈등 속에서도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셨고,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젊은 시절부터 대학의 중책을 맡으시며  쉼없이 성심교육에 헌신하셨지만, 언제나 그 기준은 “일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었습니다. 초창기 외국 수녀님들의 실책으로 빚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을 때도 선배들을 원망하거나 탓하기보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 줄 알았을 것이라며 시대의 한계 속에서 너그러이 이해하고 용서하며 훌훌 털어버릴 줄 아셨습니다. 춘천 성심여대를 마감했던 시점에도 “학생과 교직원들이 경춘가도를 오가며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을 늘 하느님께 감사하셨고, 1988년 가톨릭대학교와 통합을 추진하다가 학생들의 반대시위로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도 당신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셨지만,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학생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며 물러서셨고, 1995년 가톨릭대학교와 통합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시간은 따로 있다”며 지나간 일들에 마음을 묶어 두지 않으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한국 성심수녀회의 초창기 회원으로서 “당신 자신이 길”이 되어 후배들이 따를 수 있는 모범이 보여 주셨으며, 당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평생 큰일 작은 일 가리지 않으시고 인내와 희생으로 받아 안아 주셨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연세에도 성심학교, 가톨릭대학교 개교기념일이나 동창모임에 참석하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또 먼지나는 옛 문서들을 뒤적이며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50주년 역사인 <엠마오의 길>을 편찬해 주셨고,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 후배들을 위해 고문서를 정리하시고 영어 편지를 작성해 주시는 등 숨은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지난 12월 7일부터 병상에 누워 생활하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제자들을 만나 자애로운 사랑을 드러내시고, 찾아와준 수고에 감사하셨고, 당신을 간호하고 기도해 주는 수녀들에게도 거듭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끝까지 정갈하게 자신을 지키시며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을 사명에 충실하셨던 수녀님, 수녀님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직도 하실 일이 많으신데, 후배들을 위해 방패막이 되어 주실 일들이 아직도 많은데, 크고 작은 일에 달려가 의논할 곳이 없어진다는 허전함에 한국성심수녀회의 역사가 바뀌는 아픔을 느끼지만, 더는 수고해 주십사 붙잡아서는 안 될 하느님의 시간을 느낍니다.

수녀님, 시대의 아픔에, 가족의 고통에, 척박한 한국땅에 수도회의 초석을 놓으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수녀님, 감사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루카 16,10)는 성경 말씀처럼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예수 성심의 영광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셨던 수녀님을 성심수녀회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자랑스러운 회원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영원히 누리시기 기원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성심수녀들이 마지막 감사 인사 드립니다. 사랑하는 수녀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히 쉬십시오.

우리는 오늘 우리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김재순 아녜스 수녀님과 이 세상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보내드리기 위해 모여왔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김 수녀님과 관련된 많은 아름다운 기억을 지니고 그래서 더욱 김 수녀님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시리라 믿습니다.  나도 김 수녀님과 비교적 오랜 교분을 나누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1980년 대 후반부터 나는 성심 학교법인 이사회에 동참하면서 김 수녀님과 만남을 갖게 되었고 그 후 가톨릭 대학과 성심여자대학의 통합을 위한 준비를 함께 하면서, 그리고 통합된 후의 가톨릭 대학에서 함께 일하면서 많은 대화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함께 일하면서 정말 명철하시고 여러 분야에 해박하지만 동시에 아주 겸손하시고 활짝 열린 수녀님이시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심여자대학교 총장을 하시다가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으로 스스로 낮아지면서 통합된 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겸손하게 봉사하시는 모습을 돌이켜 회상해보면 시간이 갈수록 더 존경의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학교 일 때문에 자주 상의하고 말씀 나누고는 했어도 수녀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별로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웅산 테러에서 돌아가신 김재익 대통령 경제 수석이 수녀님 동생이고 아우의 불행한 죽음 때문에 수녀님이 많이 힘들어 하셨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수녀님은 그 밖의 가족 이야기, 집안 이야기를 거의 안 하셨던 것 같습니다. 수녀회 안에서도 별로 안 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일단 수도자가 되면 교회 공동체에서 봉헌된 삶을 살기 때문에 과거의 개인적인 일이나 육친과의 관계도 접어두는 것이 관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수녀님의 수도회 회원들을 위해서 남기신 회고록을 읽어보니 김 수녀님이 가족 이야기, 집안 이야기를 잘 안 하신 것은 가슴 속에 가족과 관련된 상처가 너무 커서 그 상처를 자신도 건드리기 싫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 수녀님은 6.25 때 아버지와 오빠 셋, 집안의 남자 네 명을 하루 아침에 잃었습니다. 서울에 살다 미처 피난을 못 간 상태에서 납치되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 때 수녀님은 서울대 화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김 수녀님은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 24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부산까지 피난하여 온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던 아버지와 오빠들을 잃은 김 수녀님은 어떻게 하느님이 한 가족에 이런 재앙을 쏟아부으실 수 있는지 너무 충격이 커서 거기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해방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갈등과 혼란을 거듭하다가 이런 참극을 일으킨 이 땅이 너무나 싫었고 여기서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진명 여고 시절 명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미사참례도 다니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했고, 수도생활에 대한 꿈도 어렴풋이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빠 셋을 한꺼번에 빼앗기는 비극을 겪으면서 믿음도 흔들리고 수도생활에 대한 꿈도 다 접었습니다. 오직 이 저주 받은 땅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 가서 삶의 터전을 잡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려가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한국을 떠날 때, 자신의 마음속으로 이 땅을 다시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아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 연학 과정 중에 그곳에서 노틀담 수녀님들의 따뜻한 배려와 친절을 접하면서 흔들렸던 믿음을 회복하고 수도성소에 대한 불씨를 다시 살려내었습니다. 수녀님이 나중에 회고한 글에서 보면 자신이 미국에 간 것은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것인데 하느님께서 다시 붙잡아 데려오셨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연금술사가 금을 더욱 순수하게 제련하기 위하여 불에 한참 달구듯이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운 보화로 만들어 주시려고 시련을 주신다고 합니다. 김 수녀님도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와 오빠 셋, 그리고 나중엔 동생까지 폭력에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면서 수녀님은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희망을 달구어 내는 단련의 세월을 살아내신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김 수녀님은 박사 과정을 다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어딘가 잘 못되었다는 느낌, 이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다시 하느님의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성심 수녀회에 입회하여 미국에서 첫서원을 하고 교편생활을 잠시 하시다가 한국으로 파견되어 나오셨습니다. 한국인으로서는 성심회 첫 번째 회원으로 오신 김 수녀님은 성심여자 고등학교 교장, 성심여자대학을 세우는 일을 해내시고 많은 성심 동문을 키워내시며 오늘의  성심 수녀회의 초석을 다지셨습니다.

지난 1월25일 나는 병원에서 많이 허약해지신 김 수녀님을 뵈었습니다.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물도 아주 조금밖에 삼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정신은 또렷하여 목소리는 가늘지만 말씀은 또박또박 하셨습니다. 수녀님은 이제 당신의 마지막이 임박하였음을 잘 알고 계시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통증으로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주사 맞아서 별로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 마음속에 원한이나 미움 같은 것이 없는데 이런 상태로 괜찮은지 모르겠다는 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속의 응어리 같은 것이 있으면 다 풀고 용서하여야 자신도 하느님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은 별로 마음속에 맺힌 것이 없는 것 같아 이대로 괜찮은지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육체적으로도 어쩌면 지독한 통증을 주실지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그런 통증도 안 주시고, 정신적으로도 크게 뉘우침이나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도 안 주시고 믿믿하고 평탄한 마지막 길을 걷게 하시는데 이래도 괜찮은지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이미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원망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 안에서 소화하고 삭히면서 충분히 용서하고 용서받는 과정을 살아내셨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수녀님과 작별하기 전에 묵주기도를 잠시 함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런 염려 마시고 하느님께 다 맡겨드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수녀님이 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다 되었으니 의사한테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수녀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나 하고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수녀님 뜻도 있고 해서 일체 병원에선 연명을 위한 조처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무슨 말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김 수녀님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의구심이나 초조, 불안 같은 것을 다 극복하시고 평화로워지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에 ‘이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말씀과 비슷한 마음이 아니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녀님을 하느님 곁으로 떠나보내는 동료 수녀님과 유가족 여러분, 김 수녀님은 다 이루고 가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심수녀회 김재순 수녀 

  • 하느님을 믿는 것은 좋으나 수녀 되지만 말라고 했지요. 

서울 종로구에서 1927년 11월에 태어났습니다. 남자 형제 여섯, 여자 형제가 셋인데 그 중에서 내가 다섯 번째지요. 오빠가 넷이었는데 마침내 다섯 번째로 첫딸인 내가 태어났을 때 집안 어른들이 모두 좋아하셨답니다. 할아버지께서 외할아버지께 농으로 절까지 하셨다고 해요. 그 당시는 사회. 문화적인 변화가 컸어요. 여자들을 교육시키는 문제만 해도 둘째 고모까지는 학교를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르쳤고 셋째 고모는 학교를 다녔답니다. 그 세월이 불과 2~3년인데도 시대적 상황이 무척 달랐던 거지요. 아무튼 당시 우리 집안 어른들의 사고는 한 세대 정도 앞섰던 것 같아요. 그러니 매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딸인 나를 상급학교에 보내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생기는 일을 없었어요. 그래서 바로 진명여학교에 진학했지요. 그런데 학교에 가 보니 다들 그리 쉽게 여학교에 온 것이 아니더라고요.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그해, 1944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까운 친척 간에는 물론 부모님도 신자가 아니셨으니 우리 집안에서는 내가 첫 천주교 신자였지요. 아주 친한 친구가 성당에 다녔어요. 물론 그 친구는 나에게 한 번도 성당에 다니자고 권하지는 않았지만,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시내에서 같이 돌아다니다가도 성체 강복 때라며 그 친구가 성당에 가야 한다고 하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서 그 친구 하는 모양을 보곤 했습니다. 그럴 때 어떤 감동을 받기는 했지요. 그렇지만 명동 성당의 독특한 분위기라든지 신비로우면서도 낯선 전례의 아름다움을 보고 세례를 받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그 친구를 보고 세례 받을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집안에서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도 그렇고 집안 어른들도 그렇고 신앙을 자유라고 여겼으니까요. ‘수녀 되겠다. 는 말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분위기였지요. 하느님을 믿는 것은 좋으나 수녀 되지만 말라고 했지요. 그렇지만 그때 저는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었어요. 내게 수도 성소까지 있는 것 같은 막연한 어떤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깊이 고뇌하지는 않고 단순하게 생각했지요. 내가 진짜 수녀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영혼의 아버지, 박고안 신부님

당시 명동 성당에 계시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고두희, 고성순 수녀님께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지요. 3~4개월 정도 공부한 것 같아요. 세례는 박고안 프란치스코 신부님께 받았어요. 이후에도 박 신부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영혼의 아버지로서 저를 잘 돌봐주셨지요. 세례명도 신부님과 그 두 분 수녀님들께서 상의해서 정해 주셨습니다. 내가 순수하고 열정적이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아녜스 성인은 어린 나이에 순수한 열정 하나로 자기 목숨까지 바친 순교 성인이잖아요. 물론 저도 성인전을 읽어 보았지요. 저도 좋더라고요. 그러니 최종적인 결정은 제가 한 거지요. 세례식은 명동 성당에서 했어요. 첫고해를 하고, 10월 3일 소화 데레사 성녀 축일에 처음으로 성체를 모셨습니다. 명동에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당에서 저 혼자만을 위한 첫영성체식을 해 주셨습니다. 물론 첫고해도 첫영성체도 박 신부님이 해 주셨지요. 박 신부님은 제가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개인 피정 지도도 해 주셨습니다.

묘하신 하느님

박 신부님께는 영신 생활면에서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물론 집안에서는 싫어하셨지요. 세상이 종교가 전부가 아닌데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고 성당에만 다닌다고 걱정들을 많이 하셨지요. 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단 취직을 해서 직장에 다니면서도 열심히 피정 다니고 성당에 나가고 했으니까요. 세례를 받은 다음해인 1945년에 광복이 되었고 그 해에 견진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은 당장 내일을 예측하기가 힘들었어요. 하루하루를 얼마나 정신없이 살아 냈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자고 일어나면 뭔가 달라져 있었고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둘 데가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으니 더욱 신앙을 찾았겠지요.

매일 아침 명동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했습니다. 효자동에서 명동 성당까지 걸어서 갔지요. 그때는 걸어 다니는 것이 당연했어요. 혹 재수가 좋으면 전차를 탈 수도 있었는데 시청 앞까지 전차를 타고 가서 내리면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성당까지 가야했지요. 그대 열심히 걸어서 지금 이 나이에도 이렇게 걸을 수 있는 체력이 길러졌던 같아요.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다시 공부할 생각은 하고 있었거든요. 서울대학교 문리대 화학과는 예과가 있던 청량리에 있었는데, 나중에 청량리 캠퍼스가 동숭동 문리대와 합쳐지면서 문리대 이학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과학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선생님이나 주변 분들이 ‘넌 문학 쪽 아니니? 네가 과학을 하겠다니 참 이상하다.’ 하셨어요. 전 사실 역사가 좋았고, 역사를 공부하는 오빠의 영향도 있어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요.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화학 전공은 당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으니까요. 일제 말기에는 과학 공부를 하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학교 입학 절차도 다소 쉬웠지요.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일단 공부를 시작해보니 과학이라는 학문은 그만둘 수 없을 정도로 내게 매력적이었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면서는, 모든 게 이렇게 무상하게 변하는데 그에 반해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불변의 진리와 질서는 얼마나 신비하면서도 놀랍던 지요. 내게는 감동이었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묘하시다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되었습니다. 원소, 분자, 원자 속의 질서와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의 질서… 이런 절묘한 움직임의 질서가 저절로 생겨났을 리는 없고 이런 질서를 만들어 낸 절대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절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묘하지요. 지금도 하느님은 내게 참으로 묘하세요.

나중에 소임으로 학교 행정을 계속 맡게 되면서부터는 공부를 못 했는데 나중에라도 내가 좀 더 자유롭게 되면 그 때 다시 꼭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이때였습니다.. 학교 운영을 하면서도 과학 한 과목은 꼭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일이 많아 지다보니 그 약속을 지키기가 어렵더라고요.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내가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가르칠 준비를 할 시간이 없는 거지요. 나중에는 내 욕심으로 ‘학생들에게 불의를 하는구나’ 싶어서 그만두었지요.

이후에 공부를 다시 하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그때는 또 병이 나더라고요. 큰 병이 나서 학교 입학 준비를 다 해놨는데도 불구하고 못 갔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하느님 뜻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것 외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더라고요.

눈물 흘리게 한 이 땅이 너무 싫어 떠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대학 4학년 때 한국 전쟁이 일어났는데 지금도 그때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쟁이 우리 집안과 이 땅을 너무 참혹하게 만들었기에 그 당시는 정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게 사실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피난을 가는데 처음에는 충청도까지 걸어갔어요. 충청도 연기군 전이면 에 방학이면 내려가 지내던 집이 하나 있었는데 일단은 그 집으로 피난을 갔지요. 거기 있다가 9월에 수복하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지요. 그런데 전쟁의 양상이 급변하면서 다시 밀려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은 모르고 겪었지만 이제 그 참상을 너무도 잘 아니까 두 번은 싫다 하고 모두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지요. 우리도 물론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우리 집안이 재산이 많은 것도, 또 현금이 많이 있어서 그걸 맘 편히 쓸 수 있는 형편인 것도 아니었거든요. 나도 대학생, 그 아래 막 대학 들어간 동생 김재숙 수녀, 고등학생 그리고 국민학생 이렇게 넷이 일가친척도 없는 타지에 뚝 떨어진 거지요. 갑자기 저와 바로 아랫동생이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다섯 식구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친한 친구 한 명이 샬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였는데, 소화 보육원에서 일하면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우리도 그 친구를 도와주면서 생활비를 마련했지요. 구호를 청하는 영문편지도 쓰고 외국의 구호 단체에서 외국인 손님들이 오면 통역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부산에서 3년 동안 피난살이 할 때 범일동 성당을 다녔습니다. 남한 사람 전부가 부산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난민들이 많았으니 방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지요. 다행히 범일동 본당 신자분이 자신의 집에 방 한 칸을 마련해 주어서 우리 다섯 식구가 들어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댁에서는 우리에게 아주 잘해 주셨어요. 막막한 부산에서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진정 하느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아무것도 없이 졸지에 길에 나앉게 된 우리 형제들이 똘똘 뭉쳐서 열심히 사는 게 보시기에 참 대견했던가 봐요. 딱하기도 했을 것이고요. 그래서 우리들을 많이 돌봐 주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의 은인이지요. 그분의 자녀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합니다. 그때 우리가 그 댁 자녀들의 공부를 봐주곤 했는데 벌써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참 오래 알고 지낸 거지요. 지금도 마치 친조카들처럼 가까이 지냅니다.

대학 졸업은 부산에서 했습니다. 거의 일 년간은 공부를 못 했지만 피난지 임시 학교에서 몇 번 강의를 하더니 졸업장을 주더라고요. 난 졸업장 받기 전에 벌써 숙명여고 선생님 자리가 정해졌어요. 여고에서는 화학을 그리고 여중에서는 과학을 가르쳤습니다. 확실한 직업이 생겼으니 먹고 사는 걱정은 덜게 된 거지요. 학교에서 3년 동안 일하면서 여러 생각을 했지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모든 것이 파괴되는 큰 아픔을 겪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 이 땅이 너무 싫었습니다. 정말 미련도 애착도 없었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떠나야겠다는 일념으로 길을 찾았어요. 유학 갈 수 있는 길을요. 그러나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당시 범일동 성당에 지금은 돌아가신 이갑수(가브리엘) 주교님이 보좌 신부로 계셨어요. 그 분은 나보다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는데 떠나시기 전에는 얼굴만 아는 정도 였지요. 그런데 내가 ‘유학 가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느냐’ 하니 이 신부님이 이것저것 알아봐 주셨어요. 밀워키에 있는 여자대학이었는데 몇 시간 학교 일을 하는 대신에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주는 정말 좋은 자리를 알아봐 주셨지요. 1945년부터 1950년대까지의 혼란은 지금은 상상 도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요. 안정이 너무 그리웠지요. 인제 여기(한국)는 그만이다. 큰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골똘히 했어요. 1954년 미국으로 떠나며 홀로 가장이 되는 동생에게 그곳에서 반드시 길을 찾겠다고 약속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난 하느님을 피해 도망간 건데 결국은 그게 다 하느님이 나를 부르시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었습니다. 내가 간 대학은 노틀담 수녀회에서 운영했는데 한국인은 전혀 없고 가르침을 소임으로 맡은 수녀님들이 계신 학교였습니다. 거기에 가서 그분들이 사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신앙생황을 할 수 있었지요. 난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고 생각해서 이 마음의 병은 절대로 치유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 때 수도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상처로 갈라진 마음이 점점 치유가 되더라고요. 그 분들의 사랑과 헌신이 저를 치유시켜 주었어요. 그 과정에서 다시 ‘내 길이 이게 아니지’ 라는 생각을 스스로 차츰차츰 하게 되었습니다. 내 길은 역시 ‘하느님께 있으며,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거지요.

제 마음에 수도 성소의 깊은 원의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났을 때 박고안 신부님께 편지를 썼어요. ‘저는 다시 수도생활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제 마음에 수도 성소의 깊은 원의가 생겼습니다.’ 라고 제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박 신부님께서 금방 제안을 하셨어요.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들어왔는데 당신 생각에는 내가 그 회에 잘 맞을 것 같으니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어느 어느 곳을 찾아가서 어느 수녀를 만나라 하고 답장을 보내 주셨어요. 그래서 내가 그 수녀원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전쟁 후에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아무개 이며 박고안 신부님 소개로 편지를 보낸다고요. 그렇게 성심수녀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수녀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난 입회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작은 아버지가 내가 수녀원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 이예요. 그런데 그 반대가 상당히 논리적이셨어요. ‘하느님 사랑이 인간 사랑과 무엇이 다르냐. 하느님이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너의 도움이 필요한 어머니와 동생들을 두고 어떻게 너만 수녀원에 갈 수 있느냐. 돌보아야 할 가족을 버리고 가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 사랑일 수 있느냐’ 하고 반대하셨어요.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요. 사실 당시의 나는 그 말씀에 대답할 말이 없었어요 차라리 무작정 반대를 하시면 반발심도 생겼을 텐데, 일리가 있으니 그 말씀을 뿌리치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니 수녀원에 들어갈 때 작은아버지 얼굴을 뵙고 가야 했을 한국에서였다면 수녀회에 못 들어갔을 겁니다. 멀리 미국에서 수녀원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너무 바보짓을 하는 것이고 어머니께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거다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지요. 하지만 일단 ‘ 이 길을 가보지 않고는 안 되겠다. 해 보고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나와서 다른 길을 가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길을 가야겠다. 라고 결정을 내렸지요.

– 수녀 노릇 잘하기를 늘 기도하셨던 어머니 기도 덕을 지금까지 봅니다. 

어디서 수녀원에 입회할 용기가 났을 까요? 그것도 낯선 외국에서요. 그건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1957년 석사과정을 마친 저는 박사과정을 하려고 다 주선해 두었어요. 더군다나 뉴욕의 대학에서 연구 장학금도 받았지요. 그리고 연구 주제를 받아서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벌써 공부를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공부를 계속 하면서도 계속 ‘이건 아니야’ 하는 생각에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잡아끄는 듯 한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지금까지 준비하던 것을 모두 버리고 수녀원에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제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고 가족들에게도 연락을 했어요. 작은 아버지가 물론 엄청나게 반대하셨지요. 그런데 마지막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분은 바로 제 어머니세요.. 어머니가 ‘만약 네가 그 길을 가야 행복하다면 가거라. 누구 때문에, 어머니 때문에 못 한다는 생각이 들면 절대로 네 뜻을 굽히지 말아라. 네가 행복해야 엄마도 행복한 거다. 그게 더 중요하다.’ 라고 하셨지요. 저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자입니다. 조용하면서도 깊고 맑으셨지요. 어머니 기도로 우리 두 자매가 여태껏 버틴 거지요. 내가 수녀원에 들어가고 나서 어머니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아나스타시아가 어머니 세례명 이예요.

1957년 가을에 수녀원에 들어가 청원기 6개월을 지내고 수련기 2년을 거쳤습니다. 그러면서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화학을 가르쳤어요. 한국에는 계속 못 왔지요. 무슨 돈으로 그 비싼 비행기 값을 마련해서 오겠어요. 그때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수련기 끝나고 1960년 9월 켄우드 수녀원에서 첫허원을 했습니다. 성심수녀회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첫 서원자가 된 거지요. 그리고 그해 9월 26일에 서울 분원에서의 소임을 받고 귀국했어요. 1954년에 미국에 가서 1960년에 왔으니 6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거지요.

동생 김재숙 수녀도 미국으로 유학 와서 공부하다가 수녀원에 들어갔어요. 동생 수녀는 이미 서울에서 성심회 수녀들과 알고 지냈고 그 수녀들을 통해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왔지요. 당시 성심회에서 운영하던 여자 대학인 뉴욕 근교의 맨해튼빌 성심여자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1961년 8월에 첫서원을 하고 제가 한국에 온 다음해인 1961년에 귀국했지요.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이 원효로 수녀원에서 살기 시작했지요. 내가 왔을 때가 서울 분원이 생긴 지 4년째가 되는 해였습니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그나마 많이 안정되었지만 외국인 수녀님들이 처음에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요. 당시 수녀원에는 외국인 수녀님들만 계셨고 한국인 수녀는 내가 처음이었지요.

한국에 오자마자 성심여자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담임까지 맡았습니다. 한국에 다시 오니 좋고 반가운 마음이 있는 반면, 몇 년 외국에 있다 와 봐도 한국의 여러 좋지 못한 사정들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구나 하는 슬픈 생각도 들더군요. 그리고 금방 5.16이 났으니, 그 혼란스러움을 또다시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는 제 마음가짐도 좀 달라졌어요. 이미 나는 수도자였고 내가 선택한 길이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수녀로서 열심히 살기 시작했습니다.

  • 성심여자대학교의 설립과 통합
  • 성심여대 설립이 처음 논의된 것은 1961년이었어요. 그 당시 드 발롱(de Valon) 총장 수녀님이 한국에 오셨는데 그 때 성심여고 학부형들이 ‘우리 딸들이 성심여고를 졸업하면 갈 수 있는 대학을 만들어 달라’고 간절하게 청했지요.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학교 설립 문제가 이야기되었습니다. 처음에 대학 부지를 춘천에 마련하게 된 계기는 구(퀸란, Quinlan)주교님의 원의 때문이었지요. 총장 수녀님이 오셨을 때 구 주교님과 춘천교구 여러 분들이 오셔서 춘천에 학교를 설립해 달라고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대학 부지를 보러 다닐 때 백 명이면 백 명 모두가 춘천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만류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천에 성심여대를 설립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잇습니다. 이야기 하자면 참 길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수녀님들은 당신들 나라에서의 경험을 좆아서 춘천에 하신다 한 거지요. 외국은 대개 대학이 대도시 가운데 있지 않고 도시와 떨어진 조용한 곳에 있잖아요. 그러니 모든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만의 특수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내려진 결정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라’ 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무튼 성심여자대학교는 1963년 12월에 설립인가를 받고 다음 해 3월 정식으로 개교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 11월에 가톨릭 대학교와 통합하기까지 30여 년 동안 저는 학장도 하고 총장도 해봤지만 대학교를 수녀회에서 운영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습니다. 수녀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 수녀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산이었어요. 한참 가서야 결국에는 ‘우리 힘으로 옮길 수 없는 산을 안고 옮기려 하고 있구나’ 하는 판단이 섰어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김수환 추기경님과 강우일 주교님이시지요. 추기경님도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무척 많이 고심하셨습니다.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잘하고 있는데 이런 조치를 취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셨던 거지요. 그분은 수녀들이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셨어요. 우리가 춘천에서 더 노력해서 어떻게든 버텨 보기를 바라셨지요. 춘천이 아니라 부천이라도 좋으니 ‘성심여자대학’으로서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그대로 하라. 그대로 하라’는 말을 계속 하셨거든요. 그러다가 우리의 상황을 다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겪어 보시고는 마지막에 ‘그럼 수용한다.’ 라는 최종 결정을 내리신 거지요.

물론 우리 수녀회 측에서도 아깝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어찌 하지 않았겠어요. 얼마나 아까워요. 거기까지 키워낸 것도 아깝고… 하지만 수십 차례 회의를 하고 같이 ‘식별’ 하면서 결정한 거지요. 지금 돌이켜 보건대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빨리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성심수녀회가 국제적인 수녀회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먼저 접하고 세계의 변화도 먼저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만일 우리가 그 학교를 그대로 운영하고 있었으면 지금 어찌했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수도자들은 신부님들과는 또 달라서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일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하고는 학교를 운영할 수가 없어요. 지금도 수많은 대학들을 보세요. 총장은 돈을 잘 모아야 해요. 돈을 잘 모아야 유능한 총장이 되는 세상입니다.

1993년 2월에 총장에 취임해서 통합 막바지 작업을 하면서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교구와의 작업 과정보다 수녀회에서의 작업이 더 힘들었지요. 우리 수녀회의 일이었기에 더 잘 보고 판단해야 했으니까요. 물론 수녀회 내에서도 반대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도록 이해를 시켜서 합의를 이루어 내야 하는 그 과정들은 지금 생각해도 참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학교 운영과 관리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앞으로의 운영이 더 어려워지리라는 것을 불을 보듯 알지만 속사정을 모르시는 분들은 지금까지 성심수녀회에서 잘 운영해 왔는데 ‘왜 통합하려고 하는 거냐’라고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회의도 많이 하고 참 힘든 과정이고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수녀로서, 수도자로서 살아온 것에 대면 일로 일로 힘든 것은 힘든 것이 아니에요.

사실 수녀들이 학교를 운영하기가 어렵다는 걸 깨달은 이후 대안을 찾기 시작한 때가 1970년대였어요. 여러 가지 대안을 가지고 숙고를 많이 했지요. 서강대학교하고 통합하는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또 백민관 신부님은 신학교 안에 건물을 짓고 캠퍼스를 옮겨서 수녀회가 계속 운영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어요. 처음 그 제안을 받고 우리 수녀회에서는 무척 좋아했지요. 그런데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니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에서 우리 여학생들이 같이 공부하다가 혹 사제가 되실 분들한테 폐를 기칠 수도 잇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방법은 좋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그래서 배려해 주신 건 참으로 감사하지만 사양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가톨릭 대학교와 총합을 하게 된 거지요.

강우일 주교님은 서울대교구에서 보좌 주교로 계시면서 김 추기경님의 뜻과 우리 수녀회의 의견을 충분히 이해해서 중간에서 무리가 없도록 잘 전달해 주셨어요. 수녀회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지요. 통합 뒤에 강 주교님은 총장을 하시고 저는 부총장으로 그분을 윗분으로 모시면서 함께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한 수녀회에 있으니 의지도 많이 되었어요. 그래도 동생 수녀는 계속 중.고등학교 교육을 했으니 숙소가 달라서 함께 산적은 거의 없었지요. 그러다가 둘 다 은퇴하고 나서야 이곳 원효로 수녀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거지요. 2000년 무렵부터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 수도자로서 평생 낮추며 작아지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자 했는데 은퇴 후에야 정말 미소한 형제가 되었지요. 

1997년 2월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전부터 계획하고 잇던 신학과 과학 공부를 하려고 프랑스로 떠났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제게 큰 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툴루즈(toulouse)에 있는 가톨릭 대학교에 다니려고 공부를 이미 시작한 상태였는데 갔다가 3개월 후에 다시 돌아왔지요. 2월에 떠나서 5월에 왔습니다. 와서 수술하고 요양하느라 병원에서 1년 정도 시간을 보냈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요. 이제는 공부는 끝이다. 나의 학문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공부가 무슨 쓸모가 잇겠는가 하는 자기 성찰을 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 다시 한 번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시카고의 루터교 신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는 대학을 다녀야겠다는 갈망보다는 강의를 들을 수 잇도록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부했지요. 6개월 정도 강의를 듣고 다시 한국에 와서 수녀회 50년사를 쓰라고 해서 그 작업을 했습니다. 사실 역사를 전공한 동생 수녀에게 50년사 간행 작업을 하는 소임이 맡겨졌는데 그걸 도우라는 소명을 내리셔서 함께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부담이 되더라고요. 제 전공분야도 아니고 역사에 문외한인 제게 50년사를 쓰라니 얼마나 걱정이 앞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침 전 세계 성심수녀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돌리는 회람 편지가 왔어요. 그 내용은 여력이 되는 나라에서 외국의 수녀회를 돕기 위해 갈 수 있으면 좋겠으며 그것을 장려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원로 수녀들이 은퇴하고 그냥 있기보다는 정신이 온전하고 건강이 허락된다면 수녀들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가서 돕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내가 일본 성심수녀회에 ‘도울 일이 없겠느냐’라고 연락을 했지요. 그랬더니 일본 수녀님들이 대환영을 하더라고요.

얼마 후에 일본 도쿄에 있는 국제학교에 와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가 국제학교 도서관에서 도서정리를 담당했지요. 물론 그 도서관에서 제가 하는 일은 정말 작은 일이었습니다. 누가 해도 되는 그런 일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일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 아주 낮아지고 작아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단지 하는 일로 이렇게 작아질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는 생각에 감사했지요. 수도자로서 평생 나를 낮추고 작아지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고자 했는데 정말 온전히 작아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사실 수녀회 50년사를 스는 것이 부담이 되어, 그 소임을 피해 보려고 일본으로 왔다는 내 나름의 성찰을 하게 되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50년사 작업을 못하겠다고 하고 여기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순명’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일 년 정도 있다가 돌아왔어요. 누군가 그 힘든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내가 돌아가서 져야 겠다는 생각으로 귀국을 했고 ‘제가 그 소임을 맡겠습니다.’ 했지요. 그 일이 크고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제가 부족하나마 엮어 놓았으니 다음 사람이 엮어 나갈 수 있는 틀은 만들어 놨다고 생각합니다.

  • 하느님의 신비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87세에 돌아가셨어요. 몸은 연세가 많으시니 쇠약하셨지만 정신은 맑으셨지요. 저는 미국에서 어머니가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서울에 도착해서 어머니가 임종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동생 수녀도 마침 외국에 있었는데 비행기 시간이 맞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왔지요. 어머니는 늘 기도를 많이 하셨어요. 저는 어머니 기도로 우리 두 수녀가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수녀원에 들어간 두 딸이 수도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일구월심으로 많이 기도하셨지요. 수녀인 우리 두 딸은 복음적으로 살기 위해서 많이 노력해야 했는데 오히려 어머니는 사고 자체가 복음적이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당신 딸들이 수녀원에 가서 맡은 어쩔 수 없는 소명이지만, 학장 되고 교장 되고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물론 수녀회에서 그렇게 신뢰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대견하고 좋다 하시면서도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니고 계셨던 거죠. ‘몸이 건강하고 수녀 노릇 잘하는 게 더 중요하지’ 하는 말씀을 늘상 하셨지요. 또 우리 어머니는 늘 다른 사람이 본인 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셨어요. 어떤 사람에 대해 제가 판단하는 이야기를 할라치면 금방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나에게 이야기하고 설득하려고 하셨지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사실 많이 힘들었어요. 구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어려운 가족사를 고스란히 겪고 돌아가셨거든요. 어떻게 87세 노인에게 그 힘든 상황을 보고 겪게 하셨을까 하는 원망에 저는 영 납득이 안 되더라고요. 한참 동안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비하시고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시는 분이신 하느님께서 어머니가 그 어려운 상황을 겪지 않고 돌아가실 수 있도록 좀 미리 당신 곁으로 불러가셨으면 안 되셨을까, 그 정도를 안 보게 해 주실 만큼의 친절도 못 보여 주시는가, 정말 하느님이 생명을 좌우하시는 분이신가, 하느님 말고 보통 사람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친절을 베풀었을 텐데… 끊임없이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그래도 되는 거지. 그래도 되는 거지’ 하게 되더라고요.

하느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이라고 하셨으면서도 그 아들을 십자가를 지고 그 힘든 길을 걸어가게 하고 마지막에 그 십자가에 달려 죽게까지 하셨는데….. ‘그게 바로 신비인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하느님은 어머니가 그 고통을 겪지 않게 하실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데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그 발치에서 고스란히 보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론으로는 다 아는 거지요. 그래도 마음속으로 수긍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요즘에는 수녀회 고문서를 정리하는데 그 일도 동생이 맡고 있는 것이고 전 옆에서 그저 돕고 있지요. 재미있기도 하고 살아 있는 1세대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수녀로서 끝까지 잘 살아가는 것이 제 마지막 소임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이 글은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교회와 역사>에 나의 신앙과 삶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010년 2월 3월에 쓰여진 글입니다.

김재순 아녜스 수녀님은 1958년 성심수녀회에 입회하여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첫 회원으로 53년간 수도생활을 하셨다. 수도자로서 교육자로서 헌신을 다하셨던 수녀님은 2011년 1월 30일 선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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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녀수녀님

허.성.녀 수녀님

오늘 여기 이 성당에 모인 우리들, 왜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인가요?

평소 호기심이 많은 수녀님이 머리에 집게 손가락을 대면서

‘으~음 뭐하는 거야?’ 하며 나올 것 같습니다.

사진 속의 수녀님은 웃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나 하느님 앞에서 웃고 있을 수녀님, 그러나 우리는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수녀님의 소식을 들었던 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챠드에 다녀오신 김숙희 수녀님으로부터 일의 전모를 들었으나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심정입니다.

슬퍼하면서 오직 위로가 되는 것은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슬퍼할 수 있는 행복,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인가 봅니다. 선교사로서 자신의 소명을 남김없이 사셨으니 복되다 할까요?

수녀님이 입회한 1988년은 성심수녀회의 첫 번째 선교사이신 필리핀 뒤셴 수녀님이 시성되셨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저희는 수녀님을 두 가지로 잘 놀리곤 하였습니다.

하나는 이름이었지요. ‘성녀’라고, 그런데 진짜야? 허 씨인 것을 보니 가짜네? 하는 것. 다른 하나는 피보색이었습니다. ‘피부도 까만데 세례명도 까밀라 인 걸 보니 진짜 까마네. 라고.

수녀님은 두 가지를 모두 이루셨네요. 너무나 빨리. 인간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의 때로써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가짜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 옆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실 것이고, 수녀님이 사랑하였던 검은 대륙 아프리카와 영원히 하나 되어 쉬게 되었으니까요.

정의로운 것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수녀님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개하고 또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수련기를 함께 보내면서 본 수녀님은 꼬장꼬장한 성격에 얼마나 물건들을 아끼는지 몽당연필을 끝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아줌마를 할 때 싸다는 이유로 시든 야채를 한 아름씩 사오곤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기꺼이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여 늘 자신을 들볶았지요.

수녀님의 첫 서원은 한국진출 35주년이 되는 동시에 관구로 승격하는 기념미사로 예수성심대축일에 봉헌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예수 성심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이미 한국 성심회가 국제 성심회에 기여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이 대두되었습니다.

첫 서원 후 6년간의 학교 사도직에 보람도 많았으나, 수녀님의 관심사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으로 1년간은 공동체를 옮겨 상계동에서 원효로 출퇴근하며 연대의 끈을 이어갔습니다.

총원장 수녀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셔서 아프리카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가슴이 뛰며, ‘바로 이것이다’라고 느꼈다고 하셨지요. 특별히 챠드는 우간다와 달리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어서 수녀님의 소명을 더욱 빨리 깊이 알아들었습니다.

수녀님이 불어를 전공한 것은 이미 하느님의 계획안에 들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총원장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늦어지니 혹시 ‘내가 부족해서인가? 자격이 없나?’ 하는 걱정을 하였지요. 여러 과정 끝에 챠드로의 선교가 정해지고, 은혜로운 종신서원을 하였습니다.

종신서원의 모토가 ‘생동하는 신앙’이며 성서 구절은 요한 복음 12장 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복음은 뒤셴 수녀님 축일 복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주 뒤셴 수녀님과 우연히 겹치게 되니 이것이 인연이고 운명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조금씩 수녀님을 이끄셨나 봅니다.

선교 사명을 살기 위한 첫 번째 파견 때에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사랑하는 부모님, 형제자매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었겠지요.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산다고 하는 수녀님을 보내주신 부모님의 관대함, 수녀님이 원하는 것이었기에 미지의 세계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보낸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종종 보내오는 수녀님의 편지는 적응의 어려움, 그러나 그 안에서의 보람, 그리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건강에 대해 언급하며 오히려 저희를 위로하였습니다. 2년 후 첫 번째 귀국하였을 때 수녀님의 모습이란 너무 말라서 불면 날라 갈 것 같았고, 까맣다고 놀렸던 그 까망이 무색했습니다. 동그란 눈은 더욱 동그랗고 반짝였습니다. 게으른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두 번째 귀국했을 때는 처음보다 나았기에 수녀님이 완전히 적응되어 가고 있다고, 그렇게 건강하니 이제 수녀님의 소망대로 챠드 지구가 뿌리 내릴 때까지 버티어 줘야지 하는 기특한 심정이 되어 간다고 보낸 편지에 마음이 든든하였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쬐그만 수녀’라고 표현하며, ‘나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수없이 되풀이 하고, 결론은 겸손되이 주님과 함께,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걸어가는 것, 먼 나라로 떠나와서 갈수록 작아지는 것을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작년에 떠나간 뒤로 이 메일도 안 되고 이제 성탄이 다가오니 성탄카드를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올해도 성탄 인사와 격려의 말을 늘어놓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의 소식은 그런 번드르르한 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젠 기름기와 숫 송아지의 고기가 역겹다고 하시는 하느님 말씀으로 들립니다.

짧으나 굵게 단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난 수녀님, 우리는 모두 신앙인입니다. 그렇지만 수녀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을 때, 저희는 마치 죄인이 된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수녀님을 몰랐을까? 인간적인 회한이 몰려옵니다. 부모님들은 아픈 마음을 끌어안으시고, 자녀가 원하는 것을 따르셨습니다.

선교지에 묻히고 싶어 한 수녀님의 뜻대로 거기 그렇게 묻힐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큰 희생, 아니 그보다도 가이없는 위대한 사랑의 결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생동하는 신앙’을 사는 것. 썩는 밀알이 되는 것이겠지요?

수녀님 이제 하느님 옆에서 저희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십시오. 수녀님이 그렇게나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 김근자 수녀

1999.07.25.

챠드 파견 미사 나눔

안녕하십니까?

이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실감합니다.
빠리를 거쳐 8월 15일 새벽에 챠드 땅을 밟게 될 것입니다.
떠나는 저를 위해 이렇게 아름답고 정겨운 자리를 마련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3년 전 총원장 수녀님의 챠드에 관한 나눔을 들었을 때부터, 사하라 사막 남쪽 끝자락에 있는 가난한 나라 챠드를 생각하게 되었고, 젊은이를 기다린다는 그 곳의 선교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충만감 속에서 식별을 시작했지만, 때때로 두렵습니다.

“내가 과연 뭘 해줄 수 있을까? 그러기엔 내가 가진 것이 너무 없지 않은가? 아프리카 더위를 견뎌낼 수 있을까? 혹시 이상한 음식을 먹으라 하면 어떡하나? 까만 얼굴의 사람들과 나는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작년에 한 달간 챠드를 방문했을 때, 문명 세계의 끝에 있는 듯한 보잘 것 없는 나라의 ᄁᆞ만 사람들과 만남의 기쁨, 친교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까맣지만 미소로 환한 그들의 얼굴은 이제 저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어느 수녀님께 솔직히 지금 좀 떨린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때 그 수녀님께서 저에게 그리스도에 절여져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 절여져서 살라는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자꾸 되살아납니다. 정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초라하게 비취지지나 않을까 전전 긍긍하는 일 없이, 힘없고 볼품 없음 속에 당당하게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만을 찾고 따르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지구 반 바퀴라는 거리가 만들어 내는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그 사랑과 그리움이 뿜어내는 기도는 제게 절대적인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기도에 힘입어, 하루하루 살아가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2004.11.16.

한국 관구의 모든 수녀님들께

소식 드린 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습니다. 한창 여름에 한가로운 휴가 생활 자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김장하실 때인가요? 곧 성탄이네요.
손 수녀님께서 이 곳을 다녀가셨다는 희소식을 들으셨는지요? 10월말, 겨우 일주일 번개처럼 마리아도 수녀님과 함께 휭 돌아보고 가셨어요. Asunda 는 손 수녀님 맞이하러 오라는 허락을 주었지만 일주일 내내 함께 하는 것은 반대했지요. 그래도 사나할 함께 지낼 수 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수도성소와 양성에 관해서는 서로 침 튀겨가며 끝없이 의견을 나누었지요. 요컨대 양성은 챠드 젊은 수녀들이 예수님께 뿌리를 콰악 박아 그 관계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민중들을 향한 연민 어린 소명의식을 불태우도록 방향 지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그 외 생활면에서의 부족한 부분은 문화와 의식의 차이를 충분히 감안하여, 시간을 두고 완곡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겁니다.
손 수녀님은 이번 방문 동안 좀 고생하셨어요. 처음엔 더위로 땀띠가 돋고, 나중엔 설사와 구토로 힘드셨어요. 두 분 수녀님들의 방문 일정을 잡을 때, 저의 촌구석 농업중학교 방문하시는 날, 그곳 선생님 집에서 100% 챠드 식사를 하도록 제가 우겼어요. 손 수녀님께서 좋아하실 거라,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요. 바가지만한 수수떡 덩어리(boule)와 염소 고기 소오스와 내장구이였어요. 수수떡이 싱겁다 하시면서, 고추 양념에 고기를 섞어 잘 드셨어요. 그래도 내장은 못 드시더군요. 결국 그 다음날 아침부터 탈이 나서 쟈메나로 가시는 여행길에 고생하시고, 그날 오후에는 열도 나셨다 하더군요.

우기가 끝날 무렵, 땅도 웬만큼 말랐을 무렵, 그래도 자동차로는 갈 수 없어 모터 보우트를 타고 농업 중학교에 갔습니다.
그 때가 10월 8일, 학교는 10월 1일에 공식 개학을 했지만, 아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교사들은 이론 수업은 하지 않고, 아이들과 논밭 농사하고, 가축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일주일간 4~5km 떨어진 곳의 시베리엔 선교 수녀회 수녀님들 공동체에서 먹고 자고, 아침에는 걸어서 점심때나 저녁때는 수녀님이 자동차로 저를 데리러 오곤 하며 지냈습니다. 아침에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 무척 피곤하기는 했지만 흐뭇한 체험이었습니다. 시골 중의 시골, 불어를 아는 이는 극히 드뭅니다. 마싸 족이 살고 있는 곳, 붉은 수수밭을 돌아 걷다가 느닷없이 저를 마주치면, 먼저 활짝 웃으며 자기네 말로 “자동차는 어쩌고 이렇게 걷느냐? 어디 가냐?” 하며 걱정스러워하는 폼이 정겨웠습니다.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선생님들 수업 참관하고 평가하며 회의하고 논밭 돌아보고 몇 끼 함께 먹었는데 나중에는 피곤해서 1시간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 몇 번을 앉아 쉬느라 2시간 걸려 학교에 도착했지요. 자동차로 덜커덩거리고 지나가는 것과 걸어서 지나는 것이 얼마나 다른 느낌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아침에 타박타박 걷는 것은 상쾌하기까지 하지만, 태양이 이글거릴 때는 엄두도 못 낸답니다.
적어도 스페인 Marga 수녀님이 쟈메나에 머무는 1월까지는 이런 식으로 농업 중학교 일을 돌볼 생각입니다. 즉, 한 달에 일주일씩 중학교에 머무는 것입니다. 교사 부인들 모임도 할 수 있고 서로 친분을 나누며, 중학교의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5년 동안 교장 일을 했던 이가 결국은 공금 횡령을 하여 해고 당하고, 도움이 안되던 다른 교사들도 계약 갱신을 안 하고, 새 교사 모집을 하여 모두가 새 사람들이라 희망을 두기도 하고, 이번에 안 되면 학교 문 닫는다 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들 힘으로 벌떡 일어설 수 있는 결심을 하도록 격려하기를 원합니다. 수녀님들도 기도로 도와주십시오.
태양열로 물탱크를 채우도록 하는 시설공사가 우리 돈으로 천만 원쯤 드는 듯 합니다. 천만 원 모을 수 없을까요?

챠드 지구는 10월 초 3번째 유기 서원자를 맞이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며 서원에 동의했지만요. 4년을 청원자로 살았던 이는 잠시 돌려보냈습니다. 성소자 한 명이 입회할 준비를 하고 있고요. 농업중학교 총 책임인 Marga가 쟈메나에 있는 이유는 재무수녀가 공석이기 때문입니다. 재무를 맡던 폴란드 수녀님이 귀국하고, 스페인 전 재무수녀님이 오셨었는데, 열풍 계절에 혈압이 190에서 200까지 올라 챠드 기후를 못 견디고 서둘러 귀국하셨기에 Marga가 재무 일을 잠시 돌보고 있습니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요. 올 9월에도 한 명의 프랑스 수녀와 한 명의 스페인 수녀를 맞았습니다.
저는 농업 중학교 일에 맛들일수록, 점점 촌 아줌마로 까맣게 그슬리고 머리는 하얘지고 있습니다. 맛들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흐뭇함으로 마음이 넓어지는 듯도 하니까요.
그러나 더위 탓인지 발끈대는 신경질, 고약함 등으로 마음 상하는 일이 잦았지요. 요즘 손 수녀님께서 두고 간 우리말 불고 관련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톈진 빠모의 마음 공부를 읽고 있습니다. 읽을수록, 나를 비우고 예수성심과 일치 융합하기 원하는 마음이 신선하게 솟아나오고, 내적 생활을 그토록 강조하신 소피수녀님 생각이 자주 납니다.
지금쯤은 신선해져야 하는데도 더위가 기승을 부려 헉헉대고 있습니다. 올해도 강우량이 적었습니다. 나무는 점점 사라져 사막화 현상이 진행되고, 다가올 열풍계절의 더위는 끔찍하지 않을까 지레 겁먹습니다. 그래도 서로 더욱 더 사랑함으로써 기쁨 충만해지면 그로써 모든 것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더욱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녀님들 한 분 한 분의 건강과 나날의 행복을 빌며 소식 마칩니다.

필리핀 수녀님의 사도적 열정의 은혜를 구하며

추모사
허.성.녀 수녀님
오늘 여기 이 성당에 모인 우리들, 왜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인가요?
평소 호기심이 많은 수녀님이 머리에 집게 손가락을 대면서
‘으~음 뭐하는 거야?’ 하며 나올 것 같습니다.
사진 속의 수녀님은 웃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나 하느님 앞에서 웃고 있을 수녀님, 그러나 우리는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수녀님의 소식을 들었던 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고, 챠드에 다녀오신 김숙희 수녀님으로부터 일의 전모를 들었으나 믿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심정입니다.
슬퍼하면서 오직 위로가 되는 것은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슬퍼할 수 있는 행복,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인가 봅니다. 선교사로서 자신의 소명을 남김없이 사셨으니 복되다 할까요?
수녀님이 입회한 1988년은 성심수녀회의 첫 번째 선교사이신 필리핀 뒤셴 수녀님이 시성되셨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저희는 수녀님을 두 가지로 잘 놀리곤 하였습니다.
하나는 이름이었지요. ‘성녀’라고, 그런데 진짜야? 허 씨인 것을 보니 가짜네? 하는 것. 다른 하나는 피보색이었습니다. ‘피부도 까만데 세례명도 까밀라 인 걸 보니 진짜 까마네. 라고.
수녀님은 두 가지를 모두 이루셨네요. 너무나 빨리. 인간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의 때로써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가짜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 옆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실 것이고, 수녀님이 사랑하였던 검은 대륙 아프리카와 영원히 하나 되어 쉬게 되었으니까요.
정의로운 것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수녀님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분개하고 또 가슴 아파하였습니다. 수련기를 함께 보내면서 본 수녀님은 꼬장꼬장한 성격에 얼마나 물건들을 아끼는지 몽당연필을 끝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아줌마를 할 때 싸다는 이유로 시든 야채를 한 아름씩 사오곤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기꺼이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여 늘 자신을 들볶았지요.

수녀님의 첫 서원은 한국진출 35주년이 되는 동시에 관구로 승격하는 기념미사로 예수성심대축일에 봉헌되었습니다. 그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예수 성심께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이미 한국 성심회가 국제 성심회에 기여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이 대두되었습니다.
첫 서원 후 6년간의 학교 사도직에 보람도 많았으나, 수녀님의 관심사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으로 1년간은 공동체를 옮겨 상계동에서 원효로 출퇴근하며 연대의 끈을 이어갔습니다.
총원장 수녀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셔서 아프리카 선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가슴이 뛰며, ‘바로 이것이다’라고 느꼈다고 하셨지요. 특별히 챠드는 우간다와 달리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어서 수녀님의 소명을 더욱 빨리 깊이 알아들었습니다.
수녀님이 불어를 전공한 것은 이미 하느님의 계획안에 들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총원장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늦어지니 혹시 ‘내가 부족해서인가? 자격이 없나?’ 하는 걱정을 하였지요. 여러 과정 끝에 챠드로의 선교가 정해지고, 은혜로운 종신서원을 하였습니다.
종신서원의 모토가 ‘생동하는 신앙’이며 성서 구절은 요한 복음 12장 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복음은 뒤셴 수녀님 축일 복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주 뒤셴 수녀님과 우연히 겹치게 되니 이것이 인연이고 운명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조금씩 수녀님을 이끄셨나 봅니다.
선교 사명을 살기 위한 첫 번째 파견 때에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사랑하는 부모님, 형제자매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었겠지요.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산다고 하는 수녀님을 보내주신 부모님의 관대함, 수녀님이 원하는 것이었기에 미지의 세계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보낸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종종 보내오는 수녀님의 편지는 적응의 어려움, 그러나 그 안에서의 보람, 그리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건강에 대해 언급하며 오히려 저희를 위로하였습니다. 2년 후 첫 번째 귀국하였을 때 수녀님의 모습이란 너무 말라서 불면 날라 갈 것 같았고, 까맣다고 놀렸던 그 까망이 무색했습니다. 동그란 눈은 더욱 동그랗고 반짝였습니다. 게으른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두 번째 귀국했을 때는 처음보다 나았기에 수녀님이 완전히 적응되어 가고 있다고, 그렇게 건강하니 이제 수녀님의 소망대로 챠드 지구가 뿌리 내릴 때까지 버티어 줘야지 하는 기특한 심정이 되어 간다고 보낸 편지에 마음이 든든하였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쬐그만 수녀’라고 표현하며, ‘나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수없이 되풀이 하고, 결론은 겸손되이 주님과 함께,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걸어가는 것, 먼 나라로 떠나와서 갈수록 작아지는 것을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작년에 떠나간 뒤로 이 메일도 안 되고 이제 성탄이 다가오니 성탄카드를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올해도 성탄 인사와 격려의 말을 늘어놓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의 소식은 그런 번드르르한 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젠 기름기와 숫 송아지의 고기가 역겹다고 하시는 하느님 말씀으로 들립니다.
짧으나 굵게 단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난 수녀님, 우리는 모두 신앙인입니다. 그렇지만 수녀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을 때, 저희는 마치 죄인이 된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수녀님을 몰랐을까? 인간적인 회한이 몰려옵니다. 부모님들은 아픈 마음을 끌어안으시고, 자녀가 원하는 것을 따르셨습니다.
선교지에 묻히고 싶어 한 수녀님의 뜻대로 거기 그렇게 묻힐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큰 희생, 아니 그보다도 가이없는 위대한 사랑의 결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생동하는 신앙’을 사는 것. 썩는 밀알이 되는 것이겠지요?
수녀님 이제 하느님 옆에서 저희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십시오. 수녀님이 그렇게나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 김근자 수녀

2004.11.16.

한국 관구의 모든 수녀님들께la fe viva

소식 드린 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습니다. 한창 여름에 한가로운 휴가 생활 자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김장하실 때인가요? 곧 성탄이네요.
손 수녀님께서 이 곳을 다녀가셨다는 희소식을 들으셨는지요? 10월말, 겨우 일주일 번개처럼 마리아도 수녀님과 함께 휭 돌아보고 가셨어요. Asunda 는 손 수녀님 맞이하러 오라는 허락을 주었지만 일주일 내내 함께 하는 것은 반대했지요. 그래도 사나할 함께 지낼 수 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수도성소와 양성에 관해서는 서로 침 튀겨가며 끝없이 의견을 나누었지요. 요컨대 양성은 챠드 젊은 수녀들이 예수님께 뿌리를 콰악 박아 그 관계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민중들을 향한 연민 어린 소명의식을 불태우도록 방향 지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그 외 생활면에서의 부족한 부분은 문화와 의식의 차이를 충분히 감안하여, 시간을 두고 완곡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겁니다.
손 수녀님은 이번 방문 동안 좀 고생하셨어요. 처음엔 더위로 땀띠가 돋고, 나중엔 설사와 구토로 힘드셨어요. 두 분 수녀님들의 방문 일정을 잡을 때, 저의 촌구석 농업중학교 방문하시는 날, 그곳 선생님 집에서 100% 챠드 식사를 하도록 제가 우겼어요. 손 수녀님께서 좋아하실 거라,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요. 바가지만한 수수떡 덩어리(boule)와 염소 고기 소오스와 내장구이였어요. 수수떡이 싱겁다 하시면서, 고추 양념에 고기를 섞어 잘 드셨어요. 그래도 내장은 못 드시더군요. 결국 그 다음날 아침부터 탈이 나서 쟈메나로 가시는 여행길에 고생하시고, 그날 오후에는 열도 나셨다 하더군요.

우기가 끝날 무렵, 땅도 웬만큼 말랐을 무렵, 그래도 자동차로는 갈 수 없어 모터 보우트를 타고 농업 중학교에 갔습니다.
그 때가 10월 8일, 학교는 10월 1일에 공식 개학을 했지만, 아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교사들은 이론 수업은 하지 않고, 아이들과 논밭 농사하고, 가축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일주일간 4~5km 떨어진 곳의 시베리엔 선교 수녀회 수녀님들 공동체에서 먹고 자고, 아침에는 걸어서 점심때나 저녁때는 수녀님이 자동차로 저를 데리러 오곤 하며 지냈습니다. 아침에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 무척 피곤하기는 했지만 흐뭇한 체험이었습니다. 시골 중의 시골, 불어를 아는 이는 극히 드뭅니다. 마싸 족이 살고 있는 곳, 붉은 수수밭을 돌아 걷다가 느닷없이 저를 마주치면, 먼저 활짝 웃으며 자기네 말로 “자동차는 어쩌고 이렇게 걷느냐? 어디 가냐?” 하며 걱정스러워하는 폼이 정겨웠습니다.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선생님들 수업 참관하고 평가하며 회의하고 논밭 돌아보고 몇 끼 함께 먹었는데 나중에는 피곤해서 1시간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 몇 번을 앉아 쉬느라 2시간 걸려 학교에 도착했지요. 자동차로 덜커덩거리고 지나가는 것과 걸어서 지나는 것이 얼마나 다른 느낌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아침에 타박타박 걷는 것은 상쾌하기까지 하지만, 태양이 이글거릴 때는 엄두도 못 낸답니다.
적어도 스페인 Marga 수녀님이 쟈메나에 머무는 1월까지는 이런 식으로 농업 중학교 일을 돌볼 생각입니다. 즉, 한 달에 일주일씩 중학교에 머무는 것입니다. 교사 부인들 모임도 할 수 있고 서로 친분을 나누며, 중학교의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5년 동안 교장 일을 했던 이가 결국은 공금 횡령을 하여 해고 당하고, 도움이 안되던 다른 교사들도 계약 갱신을 안 하고, 새 교사 모집을 하여 모두가 새 사람들이라 희망을 두기도 하고, 이번에 안 되면 학교 문 닫는다 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들 힘으로 벌떡 일어설 수 있는 결심을 하도록 격려하기를 원합니다. 수녀님들도 기도로 도와주십시오.
태양열로 물탱크를 채우도록 하는 시설공사가 우리 돈으로 천만 원쯤 드는 듯 합니다. 천만 원 모을 수 없을까요?

챠드 지구는 10월 초 3번째 유기 서원자를 맞이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며 서원에 동의했지만요. 4년을 청원자로 살았던 이는 잠시 돌려보냈습니다. 성소자 한 명이 입회할 준비를 하고 있고요. 농업중학교 총 책임인 Marga가 쟈메나에 있는 이유는 재무수녀가 공석이기 때문입니다. 재무를 맡던 폴란드 수녀님이 귀국하고, 스페인 전 재무수녀님이 오셨었는데, 열풍 계절에 혈압이 190에서 200까지 올라 챠드 기후를 못 견디고 서둘러 귀국하셨기에 Marga가 재무 일을 잠시 돌보고 있습니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요. 올 9월에도 한 명의 프랑스 수녀와 한 명의 스페인 수녀를 맞았습니다.
저는 농업 중학교 일에 맛들일수록, 점점 촌 아줌마로 까맣게 그슬리고 머리는 하얘지고 있습니다. 맛들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흐뭇함으로 마음이 넓어지는 듯도 하니까요.
그러나 더위 탓인지 발끈대는 신경질, 고약함 등으로 마음 상하는 일이 잦았지요. 요즘 손 수녀님께서 두고 간 우리말 불고 관련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톈진 빠모의 마음 공부를 읽고 있습니다. 읽을수록, 나를 비우고 예수성심과 일치 융합하기 원하는 마음이 신선하게 솟아나오고, 내적 생활을 그토록 강조하신 소피수녀님 생각이 자주 납니다.
지금쯤은 신선해져야 하는데도 더위가 기승을 부려 헉헉대고 있습니다. 올해도 강우량이 적었습니다. 나무는 점점 사라져 사막화 현상이 진행되고, 다가올 열풍계절의 더위는 끔찍하지 않을까 지레 겁먹습니다. 그래도 서로 더욱 더 사랑함으로써 기쁨 충만해지면 그로써 모든 것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더욱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녀님들 한 분 한 분의 건강과 나날의 행복을 빌며 소식 마칩니다.

필리핀 수녀님의 사도적 열정의 은혜를 구하며

허성녀 가밀라 수녀님은 1988년 성심수녀회에 입회하였다. 1999년 8월 아프리카 차드로 선교를 떠났다. 수녀님은 차드의 수도인 은자메나 성심중·고등학교애서 성경 수업과 프랑스어 수업등을 하였으며 이후 2004년 5월부터 은자메나에서 230km 떨어진 작은 도시 ‘겔랭댕그’의 농업 학교에서 2004년 11월 27일 선종할 때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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