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선물

눈먼 자 앞에 눈먼 자 앞에 눈먼 자

작성자
지선 김
작성일
2021-04-28 22:15
조회
222
미술 작품을 ‘보는’ 방식에 대한 연구 중에서 ‘glance – look - see’ 단계의 구분이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보다’라는 동일한 단어로 번역될 수밖에 없지만 의미로서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겉만 ‘흘끗 보고’ 지나가는 단계(glance) – 의식적으로 ‘멈춰서 보려는’ 단계(look) – 그 ‘의미를 알고자’ 안으로 들어가 보는 단계(see)로 구분해 보면 우리의 ‘보는’ 행위 대부분은 첫 번째 단계에 그치기 쉽습니다. 겉만 보는 정보 차원의 습득은 나의 내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방식의 보기가 지속되면, 정보 축적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상태에 빠지고 실제 봐야 할 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 악순환이 고착됩니다.


(그림 1)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이끌다(눈먼 이의 비유)’,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68) (이미지 출처 = 나폴리 카포 디 몬테 미술관 홈페이지)

얼마 전 친구 신부님이 그림 파일을 하나 보내줬습니다. 보자마자 머릿속에서는 단순 기억 차원에서의 정보가 지나갔습니다. ‘어, 이 그림 오랜만에 보네. 어느 작가의 어느 그림이구나.’ 큰 의미 없는 정보 출력의 반가움이 지나가자마자 불현듯 그림이 낯설게 보이며 뭔가 불편함이 밀려왔습니다. 보고 있을수록 마음이 불편한데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을 크게도 확대했다가, 구석구석 봤다가, 다시 전체를 봤다가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이 불편함이 적절한 언어로 튀어나왔습니다. ‘아.... 이거.... 나잖아. 어떻게 알았지.’ 나를 알 리 없는 16세기 회화의 거장 브뤼헐의 작품이 갑자기 내 속을 뒤집어 보여 주는 생물처럼 등장했습니다.

화면의 대각선 구도를 만들며 가파른 경사로 줄지어 걸어가는 여섯 인물 모두 앞을 보지 못합니다. 브뤼헐 특유의 사실적 묘사는 이들이 시각을 잃은 원인이 각각 어떤 질병이나 장애 때문인지를 후대의 의학자들이 추정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오른편 구석에 넘어져 있는 이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제목에 따르면 그야말로 눈이 먼 이들을 인도해 가다가 먼저 도랑에 빠진 눈먼 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뒤를 따르던 인물도 그 위로 포개지며 급박하게 넘어지는 중이고, 세 번째 인물의 (정강이 보호대로 강조된) 구부러진 무릎은 곧 넘어질 찰나임을 보여 줍니다. 그 뒤 세 사람도 이들과 같은 운명이며 더 큰 아수라장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예상은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뒤따르는 이들이 앞서 넘어지고 있는 이들의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해도 피하거나 멈출 수가 없는 상황임을 가파른 대각선 구도와 한 길 낭떠러지 길의 표현이 보충해 줍니다.

브뤼헐 당시 네덜란드의 문화에서 성경 텍스트는 일상 속에서 소통과 이해가 가능한 바탕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바로 해당 성경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4) 예수님은 생전에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브뤼헐의 이전 작품 중 ‘네덜란드 격언집’이 있습니다.(그림 2)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부조리함을 격언의 방식으로 모아 표현하는 나름의 인기 있고 전통적인 장르물 중에서도 브뤼헐의 이 작품은 112개에 달하는 격언을 하나의 화면 안에 연결하여 그린 대작에 해당됩니다. 여기에도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그림3) 그림 오른편 상단에 빛나는 태양 아래에 작고 검은 점 세 개와 같은 형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팡이를 든 세 인물이 서로에 의지해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기원전 800년경에 쓰인 "우파니샤드"에서도 이런 구절이 발견됩니다. “무지 속에서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지혜롭고 배운 자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은 눈먼 이가 이끄는 눈먼 이처럼 이리저리 무의미하게 다닐 뿐이다.”


(그림 2) ‘네덜란드 속담’,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59) (이미지 출처 = 베를린 회화 미술관 홈페이지)


(그림 3) ‘네덜란드 속담’ 중 부분 상세.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이미지 출처 = 베를린 회화 미술관 홈페이지)

제 불편함의 첫 단계도 여기에서 출발했습니다. 가르치고 글을 쓴답시고 한 말과 행위들이 내 자신이 정말 ‘볼 수 있는’ 상태에서 나온 것인가. ‘겉’만 보면서 마치 ‘의미’를 보는(아는) 듯 내 자신과 타인을 속인 것이 아닌가. 그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내가 보지 못하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불편하고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을 가지고 기도하다가, 오히려 여기에서 머무르지 말고 더 ‘들어가 보길’ 바라고 계시는 이끄심을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림으로 돌아가 보면, 눈먼 이들을 이끌다가 먼저 도랑에 빠진 눈먼 이 옆에 악기 하나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허디 거디’라는 이름의 이 현악기는 10세기경 교회나 수도원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칠 때 쓰이다가 점차 크기가 작아지면서 은유 시인들과 걸인들의 악기가 되었다 합니다. 사실적 표현으로서는 이 악기가 이 인물들의 당시 생활상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하느님을 거짓되게 노래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리는 앞 길을 안내하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 소리가 공허하고 거짓되다면 그들이 줄지어 향하는 곳은 여지없이 ‘도랑’이라는 사실을 비유는 분명히 보여 줍니다. 차라리 그 앞선 소리라도 없다면 각자 눈이 안 보인다 하더라도 새로운 소리를 들으려, 길을 찾아가려 노력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태 15,8-9) 눈먼 인도자로 바리사이들을 비유하신 예수님이 그에 앞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규정을 하느님의 지혜와 바꿔 버리는 이들이 ‘이 길이다’ 하며 큰 소리를 내는 상황. 자기 자신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 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잊고 다른 이들도 잊게 만드는 이 상황. 왜 이렇게 익숙하고 불편한지 며칠을 더 기도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주 ‘이해할 수 없다’고 격하게 반응한 장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할 수 있지. 저 말은 너무 거북하다.’(요한 6,60) ‘맙소사, 주님께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됩니다!’(마태 16,22) 특히 베드로 사도의 이 반응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해 놓고도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 여정을 예고하시자 튀어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내 자신이 끈질기게 만드는 주님의 상, 사실은 내 생각을 섬기는 이 거짓의 찰나를 예수님은 사랑으로 직면해 주십니다.

보는 차원에 단계가 있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차원에도 단계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만 보지 않고 그 진정한 의미를 알려 애쓰는 이성의 ‘보는’ 단계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기본 단계이자 이 역시 은총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내 뜻’이라는 걸림돌을 마주하는 불편하고 격한 여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는 주어졌을 때 잡아야 하는 큰 축복입니다. 내 앞의 눈 먼 자, 그 앞의 눈 먼 자를 찾고 탓하기 전에 내 눈이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자비를 청하는 몸부림이 우선이겠습니다. 눈먼 이들의 인도로 아수라장이 되는 우리의 길에서 다시 일어나는 각자의 몫이 사실 서로를 일어나게 하는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나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비추어 주실 은총의 빛을 청합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서강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출강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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